서른 여섯해를 살아 오면서 삽겹살집 계산대처럼 한해 한해를 결산해 본 적도 없고, 인생 최고의 아이템을 꼽은 적도 없지만, 올해 읽었던 책 정도는 반추해 보길 원했는데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읽은게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달째 잡고 있는 호치민평전이 너무 방대한 분량이란 핑계가 감성적으로 통할지 몰라도 독서의 속도가 지나치게 더딘건 사실이다. 물론, 아직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못한(책의 그 지점) 호치민에 대한 평가를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 인물이 가진 매력에 대해서는 의문 투성이긴 하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주요 요원이면서,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에 반한다고 볼 수 있는 민족해방노선을 끌질기게 주장했었던 호치민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패배주의의 극복이다.

패배주의에 매몰된 이에게 패배주의를 극복하려는 가열찬 모습은, 때로 열등감의 표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패배주의가 가장 해로운 지점이며, 의식을 그런식으로 식민지화 시킨다는 점이다. 패배주의는 경쟁을 도전이라는 감성적인 과제로 묶고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서 당당히 이겨내라고 한다.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왜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두고 그 경쟁에서 살아 남는 소수가 되어야 하는지? 왜 이러한 구조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사회적 가치와 윤리에 반동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는데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사회적 위기는 한국전쟁의 종전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해소되지 못한 물리적 조국통일의 과업속에서 제대로 반항하지 못한 민족적 사대주의는 좌우익의 대립을 지난하게 끌고 가는데 유용한 밑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좌우익의 대립각은 역사의 이항대립으로서 사회적 제도와 인간생활의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끌고 나가는 메카니즘의 휘발유 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중심적 투쟁의 대상이 여전히 좌우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씹으면 씹을 수록 재미난 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지닌 동란의 역사를 회피하면서 얻은 의식의 식민지화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변화를 오직 기술적, 개발적 변화만으로 치켜 세우는 자본주의적 발상은 좌우익의 담론을 이용하여 어떤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비틀림, 일그러진 엘리트의 초상이다. 효율적 생산을 옹호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에 골몰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반지성적 행위를 하는데 열광하고 그것을 비판하는데 침묵한다. 황우석의 거짓말도 모자라서 700 명이나 되는 비틀린 지식인들의 전시작전통제권반환 반대 성명은 반지성적 행위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에 질세라, 마시멜로에 열심히 사인하며 드디어 일그러진 엘리트 계급에 든 것을 자축했던 정지영은 개천에서 용내야 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패배주의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민족해방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와 연대해야 겠으나 그들은 혁명이 촉발할 시점이 오면 반동적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들어낼 것이 분명하다는 호치민의 주장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것은 혁명 이후, 동란 이후, 마땅히 사람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배반하고 반동해 온 자들이 이른바 반지성적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남한의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지점은 좌우익의 대립각이 아니라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들이 거대 자본과 정치 권력에 결탁하여 생산한 패배주의의 예리한 각도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리함이 난도질한 사회에서 진정한 붉은 피가 흘러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적 장치들은 제대로 된 작동을 멈춘지 오래다. 고름처럼 문드러진 패배주의가 열등감을 마치 당연한 것인양 기름칠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실천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자세 또한 문제지만, 그것이 민주적인 장치들을 중지시킨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병적인 패배주의와 상업주의로 몰아가는 엘리트들과 자본이 문제다. 그것에 반항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럼으로, 나의 올해의 책

[호치민 평전]
윌리암J 듀이커
푸른숲

[한국현대사산책]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대화]
리영희, 대담 임헌영
한길사

2006/12/27 19:46 2006/12/2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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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예감

2005/03/24 21:46 / 관심/텍스트
김지원의 '사랑의 예감'(이상문학상 당선 '97)을 읽고...


'생명이 있는한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예정된 사랑'

플롯부터 다른 글쓰기였다. 1장과 2장으로 나뉜 중편크기는 장의 내용부터가 독자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하는 의지가 있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등장인물들은 수다로 시작한다. 넓지만 인종적인 이해관계가 마천루처럼 쌓인 뉴욕은 그다지 옆사람만을 응대하여 대화하기에는 좋은 장소는 아니다. 겹겹이 쌓인 문화적 혼합은 차라리 카오스적이지만 그들의 수다는 그런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몇가지 모티브적인 개체가 확연히 등장한다. 별, 시계,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다. 별은 넓은 공간에 나름대로 빛을 내며 그대로 떠있는 섬이다. 무엇이든 두 개이상의 물체사이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별은 미약하지만 짜내듯 빛을 내며 공간이 있음을 채우고 있다. 시계, 시계라는 사치품(?)이 흔해졌음을 흐름으로 간주하며 시간은 공간속에서 어느것과도 섞이지 않는 평행선으로 우리들 삶중간을 꿰뚫고 누구나 손목에 찰수 있을 만큼 많아졌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대화를 하는 유부녀(신옥과 장미) 둘은 그들에 인연의 끈을 위해 뉴욕이라는 먼곳을 택했고 동창이라는 설정에 반가워했다. 대화의 주체로써 유부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공간에 배제된 상태로 그동안 공허로 남아있던 그들에 인연의 끈을 이으려한다. 그들의 남편들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에 책임을 맡고 있다.
몇가지 설정된 대화관계, 즉 신옥과 장미, 신옥과 장미의 시누이, 신옥의 남편과 장미의 남편, 은 제대로된 선형적 구도에서 점차 순환적인, 복합적인 연결로 어지럽게 뻗어 나간다. 간간히 대화속에 인용되는 닥터유(장미 시누이의 남편)의 환상적인 운명은 시공을 잇는 삶에 도정을 의미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해 질 수 있는 대화소재를 하나의 점으로 이끄는 구심역할을 한다.

"시인(詩人) 이태백은 시간은 지나가는 과객이라 읊었으나,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물현상뿐이더라, 시간은 '늘' 그대로다. 그래서 오'늘'이다"


닥터유의 독백같은 추억속에 간간이 산재되어 있는 이런 시간정의는 인간 개개인의 의식에 접근하고 대화 주체들의 개념적인 행동양식을 정하는 역할로 자리 잡는다.
시계라는 모티브로 전개방식을 정하고 미국교포사회와 한국적 현실-분단, 민족정체성, 인종, 언어장벽-을 대비시키고 자칫 주제를 빗나가는 소재적 빈곤의 극복을 인공수정과 결혼등으로 매꾸고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이 소설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열정적이고 애끊는 만남과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그들의 대화속에선 그런 거추장스러움은 대화거리 조차도 되지 않는 듯한 구성이 사뭇 제목과 대비되어 독자를 조롱한다.

"대화는 피곤합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부부사이에는 대화가 오히려 없는 것이 좋습니다....중략... 어떤이는 사랑을 한답시고 주고주고주고, 어떤이는 주고받고, 주고받고 어떤이는 받고받고받고, 그런데 어떤이는 시간과 공간을 줍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이어서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될일이 아닙니다."


신옥 남편의 대사는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다. 인간관계로 깊이 자리잡은 부대낌과 미움과 고움의 정, 구속같은 사랑을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연한 개기지만 강한 인연과 우연성으로 만난 결혼에 개인적인 독립과 암시적인 주장으로 익명적 행복을 요구한다. 행간 밑에 잠재적으로 깔아놓은 분단이라는 모티브와 개인 또는 민족의 정체성은 사실 커다란 줄기는 아니다. 간혹이지만 자연적, 또는 인공적인 생명의 연장이 소설을 이루는 페러다임으로 보고 싶다.
그런 연속선상에서 시간, 공간, 인위적인 국경같은 것에서 조차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이 예감을 의미하는 사랑으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대화의 종점에서 그들은 서투른 만남을 기약하지만 연속선상에 생명을 믿지 않았고 생각보다 빠른 만남이지만 그들에 존재는 다시 원래의 섬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올림픽은 그 우연성을 촉매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은 못됐다.
이 소설은 1장은 뉴욕, 2장은 서울의 상반되는 구도속에서 상대적으로 작아진 사적공간과 만남의 우연성을 소설적 필연으로 연결시키며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속성을 말하려 한다.
2장은 1장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혼자사는 그저 평범한 여자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지만 약간의 특별한 장치가 있다. 다시금 등장하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합성되어 1장에서 부부라는 태초적인 본능적 관계를 부인하는 인위적 효과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납북된 남편에 대한 한스러운 망부가는 아니다. 단아하고 단정한 이야기 흐름은 어쩌면 5년이라는 시간차가 덮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호한 안정감이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현실속에서 무거운 안정을 유지하다가도 무의식상에서 보여지는 환영과 환청을 꿈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질때가 많다. 그 무의식의 현상속에서 수천년전부터 정해져온 인류의 것, 생성과 소멸은 여성의 봉긋이 오른 배에서 생성을,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고속, 구역질나게 찢겨진 시체에서 소멸을 보여줌으로써 대비되는 시공, 현실과 꿈을 관조적으로 매듭 지어버린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만남이 이곳에서도 있다. 여자와 신옥의 남편, 지루한 서술 끝에 분열적인 대화는 이상하리 만치 운명적임을 상징하려는 질긴 교감이 눈길을 끈다.

"저도 살아나가 기쁨니다... 중략...
아내의 뱃속에 든 아기를 초음파로 검사해 보았습니다. 눈물이 솟더군요 감동이 치밀어 울다가 웃다가 했습니다. 장례식을 가봐도 그렇고 사람들은 죽는일과 태어나는 일을 큰일인 듯 여기지만 그중간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언제 죽는지 다 잊어먹고 그냥그냥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구나"


너무나 먼곳에서부터,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생성과 소멸을 눈앞에 대놓고도 시리도록 감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과 생명의 잉태는 자기유사성이라는 독선으로 말미암은 침착함 같은 것이다.
생명에 대한 아집은 너무나 본능적이다. 소설은 그런 아집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인간의 만남이 영원은 아니지만 공간과 공간속을 연결하는 목숨으로 인간은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진다. 부부라는 질긴 끈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끊기도 하고 잇기도 한다.
생명이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의미하듯이 약속시간을 정한다. 사랑의 예감은 그런 연속적인 생명의 흐름속에서 단호함을 보여주고 열정적이지 않아도 우연같은 만남속에 사랑을 의미하는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생명은 그런 사랑을 감격으로 알게 해준다. 멀거나 가까워도 그것은 교감으로 교통으로 이어준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2005/03/24 21:46 2005/03/2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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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춘수

2004/12/02 19:10 / 관심/텍스트
[뛰어난 시인과 뛰어난 산문가가 원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행복하게 증거한다. 이성복의 산문을 읽다보면, 틀림없이 '산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 속으로 들어가 있기 일쑤다.]
시인 이성복의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 에 실린 소설가 이인성의 서평이다. 위와 같은 서평의 느낌을 시인 곽재구의 포구기행과 예술기행집에서 독후감한 적이 있다. 시인이 관찰하는 이 세계의 사물, 그 사물들은 나도 익히 봐왔고 만져봤던 것들인데도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눈과 가슴의 가난함을 탓하고도 남음이다.

샤갈전에 즈음해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시인 김춘수의 시를 찾아 읽어 보고 포스트를 남긴 적이 있다. 꽃과 릴케, 부다페스트와 샤갈을 노래 했던 시인 김춘수 선생이 지난달 타계했다는 소식에 나는, 꽃이라는 시인의 시를 학창시절 어느 벤치에서, 어느 여학생에게 낭송해준 이후로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어느새 꽃의 시는 낱낱이 기억에서 사라져서 그때 그 감흥이 어지간해선 살아나지 않는 거름의 나이가 되어 버린 듯, 묵묵히 읽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도리어 세월의 생김새에 불편한 상채기만 딱지 져 흉이 되었는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꽃의 시 첫 노래에서 여학생의 치마속으로 불쾌한 손을 집어 넣는 듯한 섹츄얼리티를 느끼고 말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다음 구절에서 나는 이내 고개를 휘젓고 냉큼 담배라고 걸어 피우지 않고는 이 상상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미술학적 의미 등으로 고상하게 해석되는 시 앞에서 불경스러운 나의 새로운 미적(?) 해석은 혼자 피우는 담배 내내 난감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꽃의 해석이 차라리 꽃이 되기 전, 꽃이 된 후, 그리고 사라진 꽃에 대한 전시상황의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하려 했다. 이를테면, 전장에 아들과 남편을 내보내는 어머니가 불러보고픈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꽃으로, 명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전장에서 산화한 이름으로, 어머니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음미하는 것은 어떤가?
산화라는 말이 좀 걸리긴 한다. 산화는 본래 의미의 散華, 부처님께 꽃을 뿌려 공양하는 의식이라는 뜻에서, 散花 의 의미로 전장에서 전사함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변질된 散花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만든 말로 '사쿠라 꽃처럼 지다' 라는 뜻으로, 황국군대에 목숨을 바친 황국민이란 뜻으로 혹세무민한 말이다. 어쩐지 내 세월이 비춘 생각이 여러면에서 껄끄럽다.

시인이 되지 못해 안달 복달이 났었던 소년이 이렇게 궁상 맞고 궁색한 어른이 되어, 추모를 해도 실례가 안될지 모를 지경이지만,
시인 김춘수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1922년 11월25일 ~ 2004년 11월 29일]

2004/12/02 19:10 2004/12/0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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