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소통, 쟁취

2008/06/11 20:46 / 생각

대열에서 빠져 나와 인사동 근처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모처럼 한낮 열기가 뜨거웠다. 그 온도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늙어 버린 보수단체집회 참석자들이 걱정 됐다. 스트로폼도 쇠파이프로 바꿔버리는 언론 때문에 행여 햇빛에 쓰러져도 촛불에 데였다고 보도 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그랬다.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초등학생 얼굴이 촛불과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아스팔트 위에서 벌겋게 달아 올라 있다. 측은했다. 한낮 열기를 견디던 노인들은 모두 그늘로 숨고 그 틈을 아이들이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명백한 시위다. 하지만 생때 같은 가족들을 동원해서 산책 삼아 거리로 나온 엄마, 아빠가 태반인 이 거리의 시위에 명백한 시위라는 수식은 얼핏 가당치 않아 보인다. 오늘도 아침이슬을 부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하지만 명백한 이란 수식을 잃어 버린 우리는 낡은 뼈조각들이 또각또각 내는 소리를 경청했다. 해장국에 소주를 말아 먹으며 뉴스를 봤다. 조금전 대책위로 부터 70만 추산이란 문자를 받았으나 경찰 추산 8만이란 보도가 나왔다. 피식, 야유가 일었다. 70만이나 8만이나 도대체 얼마나 되는 규모인지 알 수가 없다. 세종로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차 버리고 아무렇게나 걸어 다니는 흔치 않은 일은 이 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잠시 사람의 끝을 확인하러 떠난 일행이 이제 남대문에서 끝을 봤다고 연락이 왔다.  세종로사거리에서 남대문까지 사람이 들어 차면 8만일까, 70만일까. 언론은 양측의 추산에 반땅을 해버린다. 대략 40만. 설에 의하면 경찰은 축구장 크기에 사람이 얼마나 들어 가는지 평균치를 잡고 축구장 몇개 정도의 규모인지 파악해서 인원을 추산한다고 한다. 여기에 인도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된다. 인도에 있는 사람은 시위자가 아니라 행인이기에. 하지만 정작 궁금한 축구장에 얼마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느냐는 경찰 기밀인듯 아무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70만에서 8만까지, 일단 시위를 시작했으면 세싸움이다. 요소요소에서 벌어지는 자유발언, 문화제를 형태한 공연이 6.10 항쟁의 대동단결 스크럼과 결사행진의 그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지만 세싸움은 여전하다. 사실 민주주의에는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거부하는 의식, 다수의 횡포가 아닌 다수의 양해가 이뤄지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이 거리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라는 스팩타클은 여전히 70만, 8만의 치열한 세싸움을 벌인다. 이 세싸움이 필요한 이유는 이 거리의 민주주의는 요소요소에서 저들마다 펼치는 자유발언과 경청 그리고 공연에 있을 뿐, 이것의 전체는 혁명이란 이름으로 마음속에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혁명을 시작했으면 숫자는 대단히 중요하다. 소수가 혁명을 일으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빠를 따라가던 그 측은한 아이는 집에 돌아 갔을까. 아이를 데리고 대열의 맨 앞에 서거나 밤 늦도록 시위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건 우리 마음속에 이미 혁명이다. 아이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존재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명박산성' 이 관광인파 5만 정도는 끌어 모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과 이 역사의 스팩타클에 동참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혁명을 이룰 수 없다. 이 거리가 가족끼리 나와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 어떤 점진적인 혁명의 세불림에 일조 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마음속에 혁명일지라도 이미 거리는 격동적인 시위의 현장이다. 아이는 어른들의 이러한 저항을 통해 더 나은 먹거리로 건강해지고 더 재미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해줘야 하는 것이지 아이 마저 8만에서 70만까지 추산되는 세력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해장국을 먹고 다시 대열로 돌아 가는 일행에서 빠져 나왔다. 다행인 것은 이명박 정부가 입에 달고 사는 '섬기는 정부' 와 '소통' 은 거짓이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증거를 삼으려 해도 되지 않았으나 어제 세종로에 쌓은 콘테이너 박스 퍼포먼스로 관념적인 거짓은 명백한 실체가 되었다. 하지만 정부가 그 담을 넘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지 않고 불필요한 내각 총사퇴 같은 동문서답으로 '이 정도까지 한다' 며 국민을 설득하는 것처럼 거리에 모인 사람들도 그 담을 넘어 '들으라' 며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가슴이 뜨거웠지만 혁명을 할 만큼 진지하거나 절실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더 많은 읽을 거리와 정보를 원하고 있지만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빠와 연인의 손을 잡은 선남선녀는 집으로 돌아간 뒤다. 우리는 이 거리가 항시적으로 놀이터가 되기를 바라고 모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물며 청와대로 전진해 가야 하는 물음에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언론은 촛불집회가 평화적으로 끝났다는 것에 포커스 되기 시작한다. 아직 쟁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쟁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 가는 것은 아닐까. 벌써 33차 촛불집회다. 이 장관을 그저 스팩타클로 남기느냐 아니면 촛불이 원하는 궁극의 이유를 쟁취할 수 있을지... 이제 마음속의 혁명을 밖으로 내 던져 그 울림을 경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2008/06/11 20:46 2008/06/11 20:46
DrunkenSTAR 이 작성.

혁명가를 떠올리며

2008/02/20 16:13 / 인물

라울, 체와 함께 멕시코를 넘어 쿠바 해변에 도착한 피델은 80명의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고 마침내 쿠바 혁명을 이뤄냈다.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체제에 접어 든 쿠바에 안주하지 않은 체는 콩고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9명의 미국 대통령을 당해내며 갈등했던 체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내놓으면서 49년전 덥수룩한 수염으로 기세등등하게 쿠바 해변에 상륙했던 혁명가들은 비로서 완전히 죽거나 늙어 버린 듯 하다.

미국의 정치선전으로 인해 북한과 다를바 없는 빨갱이의 나라로 취급 받아 온 쿠바가 알려진 것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통한 쿠바(라틴) 음악과 1990년대 부터 일기 시작한 혁명가 체 의 자본주의적 이미지 소비가 급속히 번지면서 부터다. 깡패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기 가득한 트럼펫, 콘트라베이스의 리듬은 고사하고서라도 굳게 다문 입술에서 질기게 피워 오르는 시거는 체 의 상징이 되었다. 체 는 곧바로 맥주 받침, 티셔츠, 관광지 좌판의 기념품에 찍혀 패션으로 입혀졌다 벗겨지고 젖었다가 푸석푸석 말려지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는 체 의 평전(붉은 양장에 덮힌)을 끼고 다니며 유아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짐짓 혁명인양 착각하며 겉멋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체 의 파르티잔적 투쟁과 뼛속까지 사무친 민족해방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체 의 이미지화는 팝아트가 상업적으로 대중에게 스며든 맥락과 일치한다. 어쨌든 체 는 멋있지만 미국의 선전처럼 '과격한 사회주의 게릴라'에 불과하고 그의 동지로 여겨지는 카스트로가 지배하는(그것도 독재로)쿠바는 자유세계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깡패가 득실대는 소굴로 알려졌다.  

우리가 체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맥주병에 깔린 체 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뿐이다. 어느 누구도 체 의 리얼리티와 불가능한 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어떤 부조리와 조응시키려 하지 않는다. 쿠바는 더욱 심해서 케네디의 지략(?)으로 봉쇄 조치된 나라에서 고작해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나라로 변신되었을 뿐이다. 최근 마이클 무어의 영화"식코"를 통해 잠시 등장하는 쿠바의 의료체계가 아픈 미국인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호혜적 장면마저도 쿠바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장면에서 세계 최강의 나라에서 병들어 치료 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원수 지간의 나라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고 하여 어이가 없다거나 쿠바 사람들이 이러한 무상 의료체계와 라틴 음악에 맞춰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쿠바나 그것이 어느 한쪽의 척도로 최고가 되고 최악이 되는 구도일지라도, 인간의 행복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최고에서도 행복하지 않으며 최악에서도 행복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리얼리티 아닐까. 따라서 이제 피델이 물러 난다고 하여 쿠바 민중이 해방 된 것도 행복 시작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입장과 미디어의 서구적 메가폰에 귀기울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사상적 귀머거리야 말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델이 체 의 영웅적 이미지만큼 상업적으로 전파될 소지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쿠바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서구 언론들은 하나 같이 늙고 장출혈로 병든 피델의 무기력한 현재 모습을 부각시킨다. BBC 마저도 피델의 인생이란 포토슬라이드를 통해 젊은 시절 체 의 카리스마를 능가하던 피델의 모습은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 있다. 이것은 피델의 리얼리티가 체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만한 상품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거둔 어떠한 성취나 불행이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감춰질 징조이다. 이러한 징조는 지금까지 세기를 풍미한 파르티잔의 모든 저항 역사에서 확인 된다. 확실히 제국주의와 파트레스에 과격하게 저항한 파르티잔 중에 체 만큼 유명해진 사람도, 서구 사회의 일부 지식인(장 폴 샤르트르 같은)에게 짐짓 존경을 받는 혁명가도 없을 것이다. 이는 체 가 저항한 식민지제국주의가 자본제국주의로 변하면서 이념과 혁명도 이미지로 소비될 수 있고 자본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디어나 시장이 그것을 상품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줄 때 뿐이다. 피델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난다. 이미 그는 노병으로 죽지 않고 금방이라도 벽에 똥칠할 분위기로 취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의 혁명 정신 따위는 안중에 없다, 다만 병들고 늙은 이미지가 싫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역사적 뒤안길로 쿠바의 해방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강경했던 카스트로의 권력을 이양 받은 라울의 실용주의가 미국과 소통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을 통해 드디어 쿠바가 자유 세계의 세계화적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부류들은 오로지 다국적 기업들과 투기 자본 뿐이다. 피델은 곧 소비될 수 있는 이미지인지 시장에서 확인되고 약탈의 대상인지 폐기처분 될 대상인지 가려질 것이다.(사실 아직 활발한 저항 활동 중인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도 언제 이런 자본의 처분 대상이 될지 알 수 없다.) 멀리 있는 체 나 피델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저항 정신으로 남아 있어야 할 우리들의 파르티잔에게도 영웅적은 아닐지라도 무엇에 그토록 저항하고 죽어 사라졌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번도 조명되지 못한 우리 시대의 혁명가 "김산"과 "이현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다.

2008/02/20 16:13 2008/02/20 16:13
DrunkenSTAR 이 작성.

권력을 향한 짝퉁 개혁과 천민자본주의의 난장은 참혹한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슬프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성으로 벌어지는 선거판이라고 해도 누구든지 사회를 동작하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공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스스로 자본을 축적하거나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가 되어 봐야 찢어지는 가랭이만 남는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불행이도 아니다.

더욱 기가막히게도, 자신의 처지나 계급을 여전히 자신의 희망이나 자기확대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우려한 행동을 집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농사를 지으며 한미 FTA 를 찬성하고 한우를 아껴달라고 외치는가 하면 자본주의 먹이 사슬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계급이 감히 중산층의 몰락과 나라 경제를 걱정한다. 여전히 자신의 희생이 부족함을 스스로 통곡하고 자발적 복종에 나서라 동원하는 스피커를 자청한다.

얄궂은 지식인들은 그들의 비평적 계급 활동은 줄이고 약자의 계몽과 권력 감시에서 약자 동원, 권력 집착의 듣보잡 행동으로 계급적 활동을 이동시켰다. 지식과 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은 약자에게 강자의 원리를 주입하며 환상과 염려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미래의 강자라는 환상과 강자들의 사회가 무너지면 강자가 될 수 없는 염려를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회유의 단계도 없이 자발적으로 줄서기의 끄나불이라도 잡으려고 환장들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한결 같은 정신병리적 현상은 각론이 다른 총론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한 정책적 총론을 실현하려는 특목고, 자율형사립고의 확충이라는 각론을 '참' 으로 간주한다. 자본주의 먹이 사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학벌이나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는 총론을 이해하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학 자율화와 본고사 부활이라는 각론이 이들에겐 '참' 좋은 공약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바로 비정규직으로 2년마다 실존에 빠질 세대적 고민 또한 찾아 볼 길 없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자신만은 비정규직이 안되면 그만인 영혼 빠진 좀비를 자청한다.

IMF 를 짝퉁 진보의 잃어버린 10년쯤으로 생각하는 무식한 역사 의식은 그렇다치더라도 한번도 자신들의 세대를 결정해 본 경험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만한 시대적 담론은 가질 여지가 없는 자본종속적 세대에게 희망은 여전히 돈이나 버는 것이다. 이런 세대와 이런 세대를 세계화적 적응이라고 호도하는 기성 세대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성이나 존경은 돈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이 없는 기성 세대는 아버지라도 인간적 존경을 받을 권리를 박탈 당한다. 이런 세대 간극과 계급적 갈등은 오래도록 공존하기 어렵다. 언젠가 이런 토대는 혁명이 되거나 봉기가 된다.

그래서 백낙청 선생은 줄기차게 통일을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곧 닥칠 혁명이나 봉기의 폭력을 막으려고..

2007/12/04 15:07 2007/12/04 15:07
DrunkenSTAR 이 작성.

공멸할 대선구도

2007/11/23 18:26 / 생각
단순히 볼세비키 무력 혁명 쯤으로 폄하되는 러시아 혁명은 사실 가장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된 무혈 혁명에 가깝다. 혁명은 하나의 파괴의지와 하나의 건설의지로 자의식을 형성한다. 이러한 혁명의 자의식은 무엇보다 다수의 민중이 민주적 결정을 하기 위해 동의와 비판의 역사적 동력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나운 에너지가 되거나 해프닝이 된다. 혁명은 분명히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의지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현재의 어떤 사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정치적 연설과 정책 그리고 읽을 거리에 대한 놀라운 집착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공화적 대의 정치에서 선거는 제도적인 혁명에 가깝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 뿐만 아니라 정치 조직적 에너지와 사회 전반의 담론이 집중되어 폭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OECD 가입국으로 사회 깊숙히 세계화가 점진하고 있는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 주식을 하고 부동산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혼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 남으려는 시도는 완전한 시대 착오이다. 장기적으로 개별 자본은 집적된 자본으로 이동하고 단위 노동력을 가진 대게의 민중은 잘 살기 위해 노력했던 추억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물론 자신의 생각도 바꿔야 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왜, 노력했는데 못사는가?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는 현대 정치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제도 개혁인 셈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늘날 저항해야 하는 것은 군부독재나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계몽하는 이유가 독재자도 언젠가는 죽는지라 한계가 있지만 자본은 한계도 물리적 임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잘 살라는 유혹으로 인간의 영혼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고 기생하며 정치의 폭발적 증후가 시작되는 선거에도 예외 없이 흡혈한다. 잘 살려면 시스템, 즉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잘 사는 것은 모두 굉장히 잘 사는 말도 안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두 조금씩 잘 사는 체제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한 혁명을 누가 꿈꾸고 있는지 놀라운 집중력으로 살피지 않고서는 자본과 자본의 이익에 투철한 프로파간다와 진정성을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구별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대선 구도는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분해야 할 참담함이다. 온갖 범죄의 지명수배자들이 나와바리를 놓고 패싸움을 벌이는 구도에서 유권자는 선거법의 정신적 구속으로 인해 조난 신호조차 보낼 수 없다. 지지와 비판을 공유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유권자의 모든 권리는 선거일의 한표로 요약되어 버렸다. 유권자가 권리의 보유자가 아닌 인간으로 서 투영되어야 할 교양이나 태도 따위가 개인 문제로 치부되면서 우리는 시스템을 바꿀 현실적 기회를 잃어 버리고 있다. BBK 와 이명박만 남아 있는 이러한 선거는 한국 정치의 수치다. 이런 선거를 치뤄봤자 어떤 합당한 결과나 잘 살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민주화를 가장한 반민주주의 세력에 패배했고 부패의 순환고리에 지쳤다. 혁명은 커녕 공멸할 선거만 남았다.
2007/11/23 18:26 2007/11/23 18:26
DrunkenSTAR 이 작성.

혁명

2006/11/21 00:48 / 생각
21세기에 혁명이란 단어는 죽은 텍스트라는 말이 있다. 텍스트는 죽었으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은 개혁과 혁신이란 활동성 넘치는 개념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윤을 창출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21세기적인 혁명으로서 개혁과 혁신을 요구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이윤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사회적 공공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 목적을 거세한다.

어떤 혁명이나 개혁에 있어서 그것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상보다 이를 원리적으로 뒷바침 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덜 받는다. 혁명과 개혁은 같은 단어가 아니며 개혁은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폭력적 절차를 수반하던 비폭력적인 민주적 절차를 수반하던 원래의 질서 가운데 일부는 남게 되어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해도 원래의 질서 중 일부는 남게 되고, 남는 질서는 반드시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충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리 개혁을 해도 분배할 수도 분해할 수도 없는 원래의 질서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를 변화 시키는 민주주적 절차로 한나라당이라는 대안이 마치 개혁인양 인식하는 무리들이 바로 남겨진 원래의 질서들의 총합이라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집권 세력의 변화를 통해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군주제를 유지 하는 것이며 그나마 파괴된 원래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이 전부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역사에 기록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땅히 진보해야 할 역사를 되돌릴테니까.

혁명은 이데올로기에 지배 받는다. 혁명은 한 체제를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 되는데 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오직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남는 이유는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메카니즘일 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시대인들이 어떻게 살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돈을 결부 시키는 것은 그만큼 자본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시스템, 즉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사인 셈이다. 자본의 탐욕과 자기 확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아 혁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천천한 개혁으로 할 수 없을 때 비로서 혁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운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을 기록한 존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의하면 계급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혁명 전 러시아는 연설과 읽을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빨아 들이는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도시의 골목은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발언대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인민들이 갈구한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엄청난 읽을 거리, 즉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비참한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혁명을 진두할 수 있는 혁명가를 필요로 한 것은 혁명가의 요구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가는 기존 체제에 안주한 계급에서 나오지 않으며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행동적 규범이 따르게 된다. 이는 19세기의 극단적인 혁명가였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문답' 에서 얻을 수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는 혁명적 대의에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무자비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일 수도 있다. 혁명가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닌이나 호치민은 네차예프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좋아했고 그들의 혁명적 경전과 강령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혁명가는 고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자본교환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중적 유행만이 있을 뿐이다. 억압은 있으되 어디서도 혁명적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혁이라는 자본의 헛개비를 믿고 국익적 선동에 무리지어 사상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유교적 사상을 자본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고 민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회 공동체에 진작하는 노력은 없고 개별 집단에 대한 복지만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저급한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좀 더 불공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획득이나, 남보다 먼저 자본의 흐름에 양탄자를 깔고 눕는 것이 유일한 삶의 치열함이다. 그런 치열함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본의 물음에 대입시키며 고민한다. 그러한 방정식에 필요한 건 성형수술과 사치품, 그리고 적당한 동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는 아직 혁명 같은 순결한 대의가 필요하지 않다.
2006/11/21 00:48 2006/11/21 00:48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