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르완다를 그저 감동적인 영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영화 홍보용 홈페이지의 타이틀인 기적과도 같은 용기가 시작되는 곳이란 진부한 마케팅적 텍스트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루세사바기니의 용기가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래서 아름답다던지, 아프리카의 쉰들러 리스트 라는 댓글평은 차라리 영화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영화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내전으로 서로를 잔혹하게 학살하는 1994년의 상황과 그 와중에 살아야만 했던 르완다의 민중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바퀴벌레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그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감동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폴 루세사바기니의 행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남기고 죽음으로 부터 떠나야만 하는 서구 외국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종족 갈등은 왜 일어 났으며, 서구 사회(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외국인들이 아닌 멀리서 지켜보고 결정하는 사회)는 왜 이들이 벌이는 대학살을 방관해야 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종족 갈등은 1919년 벨기에가 르완드를 식민지배하면서 생겨났다. 벨기에는 편리한 지배를 위해 종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인사정책을 시행한다. 다수인 후투족을 배격하고 소수인 투치족에게만 낮은 관직을 주며 두 종족간의 우열을 갈라 놓는다. 그로부터 두 종족간에 끊임없는 분쟁이 발생한다.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식민통치이념은 생존을 위협하고 결국 인종청소인 제노사이드가 일어 나는 상황이 되자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한다. 세계 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은 왜 방관 했을까? 1992년 소말리아에는 3만의 미군을 투입하여 중재를 했던 사례가 르완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이유가 소말리아에는 4개의 미국 유전 업체가 원유를 채굴하고 있었고 르완다에는 아무런 정치 경제적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25만의 투치족이 후투족 시민군에 의해 학살되는 동안 폴 루세사바기니는 1200여명의 투치, 후투족 난민을 그의 호텔에서 지켜낸다.
서구사회의 인도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작동하는 이념이다. 비단 르완다의 경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호텔 르완다는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서구사회의 모순과 작동원리를 지상의 둘도 없는 이상인양 추구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부조리한 일들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다. 희망을 만들었던 콘스탄트 가드너와 달리 호텔 르완다는 분노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보여주며 불편하게 만들고 알아가게 만든다. 영화는 묻는다. 불편해라, 저 사람들을 보라, 불편한 그대들이 방치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방치가 공공연하게 늘어가고 있다. 평택 사람들이 그렇고, 매향리 사람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이념에 내몰리는 모든 민중들이 그렇다. 계속 불편해 하기에는 우리의 피가 너무 빨갛고 너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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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雨 2006/09/21 03:5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영화에 대해선 이야기를 못하겠습니다만, 블로그질을 하면서 본 제일 좋은 영화평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Jack 2006/09/21 17:48 편집/삭제 댓글 주소
영화 꼭 보세요~ 저도 한번 더 보려 합니다...^^
알쏭달쏭 2006/09/21 14:3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좋은글 잘 봤습니다 :)
Jack 2006/09/21 18:02 편집/삭제 댓글 주소
상상도 안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 납니다. 모르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살 수 없는 마음 같은 것이 회복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답하고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