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무섭긴 하다. 대체로 사회 부조리에 연민하다가도 국가적 가치와 대립할 때 그 연민을 가차 없이 거세하는 무의식의 의식은 교육이 아니고는 형성될 수 없을 터다. 이러한 지향은 비정규직 차별 반대를 외치면서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이율배반의 디테일을 가져 온다. 사실 이러한 큰 가치에 대한 대립은 단순한 이율배반이 아니라 정리의 차원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도하며 아프간에는 온통 사막과 총을 든 탈레반만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안타깝다' 는 경제를 넘어 활동가 '미니'의 말은 새길만 하다. 미니의 블로그에 가보면 그가 아프가니스탄을 정리한 여러 글을 볼 수 있다. 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한두개의 글만 읽어 보아도 오늘 우리에게 닥친 사태의 본질에 대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무엇에 분노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 이러한 분리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지성으로 다루어져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최소한 감정 덩어리의 배설을 집약시킨 테그라는 기술적 존재가 집단지성이란 거창함으로 포장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아프가니스탄 사태에도 어김없이 국가주의가 등장한다. 이는 본래 국가 없이 살 수 있냐 는 일종의 교조주의인데 국가주의의 투철한 주입은 나라 없이 사는게 서러웠던 그 시절, 겨우 민족만 부지 했던 식민지 시대를 거슬러 국가 독재와 동원 체제를 구축한 군사정권 시기의 교육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그 잔재적 청산을 '국가'로 접근하여) 국가의 대안적 개념을 공상적 논리로만 구성한 아나키즘 따위로 정의하고 이것을 국가의 대안으로 선전하는, 즉 A급 진보를 자처하며 공격당하기 딱 좋은 위험한(?)스탠스를 취하는 사람을 본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작은 단위의 공동체를 실현해보이시는 귀농파 생명주의자들의 헌신을 존경하지만, 마냥 동경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이다. 왜냐,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누구나 남은 돈을 저축하고 집을 늘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욕구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그것의 목적, 개인의 가치 보다 국가의 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목적을 고조시키기 위해 대결 구도를 선호한다. 대체로 스포츠에서 벌어지는 국가 대항에서 이런 대립 구도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나라 사랑하는 순수한 행동도 있고 그걸 다 국가주의라는 다소 건조한 범주에 싸잡기는 어렵다. 다만, 국가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로 승화될 것이란 막연한 환상은 깰 수 없더라도 그렇지 않은 소수, 즉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애가 중요해요, 라는 양심적 시선을 거두라고 생때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때 없이 국가주의가 살아 남을 수도 없는 처지인게다. 국가의 위신, 국가의 이익, 대한민국(또는 한국인)의 위대함 따위가 한강의 기적 같은 것과 접목 되면 비정규직도 불가피하고 개방만이 살 길인 오늘날의 프로파간다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쯤은 정리되어야지 생때만 쓰면 그게 착각이고 환상 아니고 무엇일까.(외국 나가서 외국 사람이 한국사람 최고, 엄지손가락 올려 보이면 국가의 위상이 어떻고 하는 감상에 젖는 것, 밖에 나가면 애국자 되요, 이런 것들 다 환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애국의 유령이 떠돈다. 애국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과 애국하는 사람의 구별법이 없다. 유무형의 국가 이익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개량화 시킬 것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는 애국 환상에 빠지면 비정규직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개인의 가치와 국가의 가치가 대립할 때 개인의 가치와 인류적 희망의 편에 선 사람들을 매국노라는 굴레 안에 넣는데 거침이 없다. 매국노라는 국가주의의 지령은 잔인하면서도 그것을 선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안락하다. 이건 국가라는 완전한 고정적 관념을 인정하는 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적으로 치를 떠는 매국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마치 공노의 대상인양 추락시킨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파쇼적 안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쇼가 아니어도 국가와 체제, 대한민국과 자본주의, 당연한 그것에 의문을 던지면 대게의 대중들은 이러한 소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우익 국가주의의 주역인 조갑제씨의 주장처럼 빨갱이들은 북으로 부터 지령을 받는다고 하니, 먹물 좀 먹었다는 사람들은 친북좌파 쯤으로 분류를 해준다. 한국적 국가주의는 미국적 가치를 인정함으로서 그 완성을 이루는데 이것을 비판하니 응당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가 되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에 종속된 사람들은 이러한 단순한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태도다.
왜 아프가니스탄 사태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 나야 하는 것인지(가지 말라는데 가서? 역시 단순하다.) 쏘련과 미국으로 부터 연달아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의 삶은 어떤 것인지, 왜 테러는 일어 나는지, 테러와 같은 폭력은 왜 쓰는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인지, 세계화를 추구하는 국가주의에서 왜 이런 문제는 다루지 않는가, 이것이 다 서구적 관점으로만 해석된 한국적 국가주의의 한계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떠들면서 하는 애국은 다 가짜다. 이 시대의 가장 복잡한 예술가이며 사상가인 백남준씨를 봐라.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고 하는데 정명훈 보다 더, 복잡하니 애국주의에 넣지도 못하고 이해가 안되니 국가주의로 떠들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애국자는 애국한다고 대한민국이 어떻다고 대중 선동하듯 부러 떠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어디 가서 외국인이 백남준을 얘기하면 백남준 또는 그의 작품을 얘기할 일이지 대한민국은 얘기할 필요도 없다.
애국 황홀경은 없어야 한다. 아니 국가 이익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청년들은 일할 곳이 없고 학교 졸업해서 기껏 취직하면 바로 비정규직인데다가 그것도 2년도 못갈 형편이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 자갈밭은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포기하고 고만 접으라는데, 그럼 이것도 국가 이익을 챙기지 못한 노무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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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석방될 수 있는 가 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40여일 동안 사람들은 두 가지 분노를 표출했다. 하나는 탈레반에 대한 분노, 이것은 두 명의 피랍자가 살해 당하면서 군사행동 여론까지 치닫는 보편적 분노를 자아 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분노, 기독교의 무차별한 선교 방식이 화를 불렀고 그동안 기독교가 벌인 예수님 판매 방식의 기독교 선교에 치를 떨던 대중들의 이유 있는 분노를 불렀다. 이유가 있어도 찬찬히 뜯어 볼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그렇게 교양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전체의 합의인양 대중을 등에 업고 덧글 폭력에 나선 사실은 이미 주지적이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전원 석방될 것이란 보도(아직 확인은 안됐지만)가 나왔고, 그것도 몸값을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자 서서히 구상권 얘기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구상권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의 빚을 갚은 사람이 다른 연대 채무자나 주된 채무자에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대중의 분노가 증오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구상권이 존재한다면 증오를 이해하는 차원도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가 종교의 믿음과 예수의 헌신을 자본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를 상업화 시켰던 한국 종교의 부조리에 가해지는 분노를 이해한다 해도 피랍자들에 지불 될지도 모를 몸값에 대한 국민 구상권 주장은 공동체도 이성도 없는 자본교환적 존재들의 폭력일 뿐이다. 응당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에게 '몸값은 세금' 을 주장하는 소위 애국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성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마치 국가가 세금을 푸대자루에 싸 담아 피랍자 가족을 대신하여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몰고 가는 발상은 예수를 상업화시킨 종교와 이론의 야합만큼이나 창조적이다.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천박한 공동체 정신에 이러한 계약 관계가 마치 합리적인 공동체인양 선동하는 등가의 원칙속에 탄생한 OECD 가입국, 대한민국을 잘 살펴보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적 문제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을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자정이나 학습 능력이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다만, 실체적 개인과 관념적 대중만으로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를테면, 구상권의 주장은 돈이 없으면 납치되도 풀려 날 수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은 이 상황이 개인과 관계가 없고 세금이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없었던 증오와 결부시켜 주장하게 된다. 굳이 '네 가족이 그 상황에 처했어도?' 라고 물어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분리 되어 있다는 해석으로 무마할 일이 아니다. 애국과 국익을 동일 시 하고 애국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애국은 대게가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 뿐이다. 생업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국가와 민중을 이반시키고 공포를 유발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게다가 대게가 국익이 아닌 것도 일단 관념적 애국의 범주 안에 들게 되면 반대 없는 동의와 다수결의 원리로 비판적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하기 일쑤다. 이쯤되면 국익이나 애국이나 개인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국익과 개인의 이익을 동일시 하고 국가의 손해를 개인의 손해로 일반화하게 된다. 개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대도 국가에 물어 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따위에 빠진다. 자신이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상태, 판단 상실의 증후군에 빠진다. 이러한 증후의 상태에서 공동체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보호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의무와 권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로 매장된다. 이건 사회도 공동체도 아니다.
근대 공화적 공동체에 세금의 위치는 국가적 국익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익이다. 세금을 어떻게 국가의 쓰임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동안 정부가 행해 온 부패를 견주어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정당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에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우리의 세금이라면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허튼 쓰임새보다 휠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들을 싸잡아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치부하는 것은 옮지 않다. 그들의 문제와 살아 돌아와야 하는 문제는 분리시켜야 정당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또는 대중이 구상권을 주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건 파렴치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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