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강의를 갔다가 혹시 NL 계열이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 이른바 386 의 거대담론인 PD, NL 노선이 여전히 진보라는 범주 안에 늠름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나보다. 노선이 분명하던 시대에는 노선 갈등이 주된 담론이었을 터, 헤겔의 변증법이 현실적으로 힘쓸 수 없는 지경에서 PD, NL 은 지난한 분열을 겪었지만 오늘날 그것과 하등 관계가 없는 나에게 까지 예의 없이 다가온다. 이른바 386 의 저열한 변질을 조망하게 되었지만, 사람은 죽어도 노선은 살아 있는 셈이다. 물론 노선이 가치로 전환된 시대에도 PD, NL 을 운운하는 공룡 같은 사람들이 있고 이러한 화석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이유에 기득권이 자리하고 있는 꼬까운 기분이 아니 들지도 않는다. 여하튼 이상주의자, 관념주의자로 제도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고 그것이 마치 레닌의 쏘비에트 혁명과 견줄만한 다수의 열정적 무리로 집합되면서 이른바 "빠"의 시대를 열었다. 이데올로기적인 '노선'에서 자본주의적인 '가치'로, 정보혁명을 통한 문법으로서의 '빠' 까지 이상과 정체성의 감수성은 표정만 달리했을 뿐 갈등은 여전하다.
해방 후 좌우의 노선은 여전히 대립적이다. 이런 정치적 노선은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다만, 우익은 현실 정치의 동반자였지만 좌익은 재야 였다는 사실, 그로인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통해 재야의 정치가 현실의 갈등과 대면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혼란은 이른바 노선의 진지함이 대중의 이해관계 또는 정치의식과 너무 외람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해탈이 노선 변질의 명분이 될 수 없지만, 그 명분이 정당하다면 노선의 진지함도 포기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개혁진보라는 노선이고 소위 짝퉁 논란이다. 적당히 가격이 매겨진 짝퉁은 진품 만큼 오래 가고 면밀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대게의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핸드백 원리에 비추어 좌파의 개보를 잇는다는 개혁진보의 짝퉁성은 그만큼 오래가고 매혹적이다. 이런 짝퉁 논란이 지리하긴 하지만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은 좌파의 진정성이 퇴보 되었다기 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좌파 노선으로 괘도를 옮긴, 즉 진지함을 걷어낸 탈권위주의로의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노선은 죽고 사람은 살리고 본 정치적 조류는 우익에 가까운 좌익을 형성하게 되었고 참여정부 정도면 충분한 빨갱이임을 유권자의 이성에 각인 되었다. 이에 진보는 의레 개혁 안에서의 개혁, 우익에 가까운 좌파적 개혁을 추구하고, 노선이 죽은 지식인은 체제의 연관성은 고려치 않고 이러한 개혁의 진보성에 대한 패러독스만 선언하는 꼴이 되었다. 더 많은 자기 혁신과 체제 저항을 통해 얻어 질 수 밖에 없는 사회개혁의 스팩트럼을 서너단계는 줄여버린 결과를 초래한 정치적 개혁진보는 그로 인해 짝퉁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 개혁, 진보, 또는 개혁진보라는 단어는 결코 진정성 있는 진보의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진보가 집권 후 걸어 온 노선은 교묘한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하다. 오죽했으면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정리까지 했을까. 따라서 여러 정책들은 패러독스가 아니라 개혁진보의 괴이한 노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진정성 그 자체이다. 즉 스팩트럼을 줄이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진보를 개발, 성장, 가치변조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유의미로 대입하기 위한 시도들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미FTA 와 통하며 양극화를 해소한던지, 파병을 통하며 평화를 추구한다던지, 대추리, 새만금을 통하며 관용과 환경을 설득하는 자세가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라 사상이 없는 노선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서 교활하다. 이제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개혁진보는 정치적으로 단물이 빠질 만큼 빠진 진보의 이름을 바꿀 태세다. 정책실패가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된 민심이반에 가장 적절한 대처는 무엇보다 바꿔타기이며 필요한 건 선전정치의 새로운 구호이다. 이른바, 중도, 실용의 기치인데 개혁진보의 노선 아닌 노선의 요로에는 이미 중도실용이 저변에 깔려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교묘하다.
한국정치는 대척점의 역사, 정체성의 정,반에서 활성된 갈등의 소산이다. 역사의 동력이 이 정, 반의 비판과 동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노선의 역사이다. 원본과 복제의 시대를 넘어 복제와 시뮬라크르의 현대 사회에도 노선은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사필귀정한 원칙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짝퉁은 복제와 다르고 대신 시뮬라크르와 닮아서 원본이란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에는 명분이나 명분의 근거인 노선이란 것이 있는데 개혁진보는 명분은 있으나 노선이 존재하지 않는, 원본 없는 이미지만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된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구호는 알지만 비전은 모르며 절차는 알지만 사상은 모르는 매카니즘만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매카니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개혁진보세력이 중도를 향하거나 더욱 해괴한 '불온자유주의' 같은 노선을 통해 재집권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빠' 정치의 시대를 연 것도 개혁진보세력이며 개혁진보를 그 이름 자체로 쓸 수 없는 짝퉁으로 전락시킨 것도 그들이다. 대립의 각 위에서 이합집산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중도를 통해 '빠' 를 집단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신념은 여전히 해괴하다. 즉 중도가 정권을 창출하는 한국정치사의 일대 사변을 모반하는 개혁진보세력의 행보가 그래서 매카니즘적일 수 밖에 없다. 맥락 차원에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물론 중도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대중의 일반적 정치의식 수준을 과대평가하고 좀 더 넓은 정치 스팩트럼의 창조를 포기한 개혁진보세력만의 황홀경일 뿐이다. 이러한 황홀경 때문에 진보로 향하지 못하는 민중들이 생겼으며 이에 대한 노선상의 성찰이나 책임이 없었던 고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수화 되어 가는 현실을 좌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혁진보세력이 집권 기간 동안 보수는 보수요, 진보도 보수, 부드럽게는 실용보수라는 수정 노선에 복무한 탓에 오늘날 가장 악질적인 사회 보수화에 기여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이 책임을 전가도 희생양도 만들지 못하고 맞닥드린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그들의 히든카드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을 수 밖에.
자기혁신과 체제개혁은 같은 말이다. 게다가 진보적인 소신이다. 이러한 진보적 소신을 가졌던 수많은 민중들이 진정성 있는 진보로 가는 요로를 막아선 개혁진보세력 때문에 다시는 진보로 갈 수 없는 지경에 도달 했다면 이는 한국정치의식의 완전한 퇴보에 기여한 것이다. 짝퉁의 구린 냄새는 여전히 매혹적인 겉모습 때문에 아주 가까이 가지 않고는 맡을 수가 없다. 이들의 트랜스포머적인 변신은 정치공학을 새로 쓰고 그 독해 마저 어렵게 한다. 짝퉁은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레토릭만 있고 노선이 없는 짝퉁은 절대로 정권을 재창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보수와 이른바 짝퉁인 실용보수 내지는 진보의 탈을 쓴 실용진보의 대결은 어차피 보수 대 보수이기 때문에 진성진보로 갈 수 없는 민중들이 짝퉁진보이며 보수 노릇도 걸음마인 범여, 개혁진보세력을 선택하기란 만무하다. 따라서 보수화를 거쳐 전통 보수를 선택하는 것은 엄연한 맥락이다. 그 거창했던 노선을 살리기엔 이미 이들의 정체성을 담은 신체가 너무 많은 악세사리를 달아 버렸다. 개혁을 체제내 소극적 변화로 축소시킨 노선에 어떤 악세사리를 달고 치장을 한들, 경선쇼와 후보 단일화를 한들 이미테이션 수준에서 반짝일 것이 분명하다.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 더 진보로 갈 수 있는 민중들의 노선을 막은 짝퉁정치의 기록은 차라리 삭제되어야 할 명백한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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