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는 "법에 의한 통치"란 단순한 단어풀이가 아니다. 현대국가의 국민은 국가에 모든 폭력을 위임했다. 이에 국가는 모든 폭력을 독점적으로 지배한다. 법치란, "그것을 행사하는 국가가 공권력이란 고유 권한을 집행할 때 엄격한 법규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권력 행사 시에는 모든 국민의 자유, 헌법적 가치,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한 완전한 제도적 규범적 테두리를 절대 벗어 나선 안된다. 우리가 시위를 하다가 폭력을 행사하면 공권력이 그러하지 못하도록 공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집회, 시위 자체를 막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태는 무엇인가?

오늘날 한반도 남쪽의 인민들에게 가학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공권력은 과연 현대국가의 그것이라 볼 수 있을까? 폭력을 위임하고 폭력을 행사할 뜻이 없는 시민들이 어떻게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지 그 답은 시민에게서가 아니라 공권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이 사적 집단과 영합하여 시민의 생존과 권리를 불태워 버리는 끔찍한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것은 법치의 테두리를 명백히 벗어난 무수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공권력은 이미 2009년 1월22일 용산에서 법치이란 이름을 잃어 버렸다.

오늘날 한반도 남쪽은 법치국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 쌍용자동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역시 법치국가가 아님을 반복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슬프다... 법치국가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
슬프다... 이걸 보고 MB 도 역시 법치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http://drunkenstar.tumblr.com/post/134617071/ssangyong

http://mel21.tistory.com/entry/%EC%A7%80%EA%B8%88-%EC%8C%8D%EC%9A%A9%EC%9E%90%EB%8F%99%EC%B0%A8-%EA%B3%B5%EC%9E%A5%EC%97%90%EC%84%9C%EB%8A%94
2009/07/03 15:16 2009/07/03 15:16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인정

2009/06/30 16:39 /
A : 저를 그 TF팀에서 빼신 건 제 능력이 부족해서 인가요?
아니, 다른 팀원들이 불편해 해서..
A : 제 태도에 문제가 좀 있긴 하죠... 쩝, 다음엔 저 안부르시겠어요..?
아니, 자기에 대한 내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또 부를 거야, 내 생각엔 내가 팀빌딩을 잘못한 것 같아...
2009/06/30 16:39 2009/06/3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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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쌍용자동차의 문제는 결코 새삼스럽지 않은 문제다. 우리는 기륭전자의 90일 넘는 단식과 화물연대 박종철의 자살을 목도한 바 있다. 기륭전자는 아직도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화물연대는 특수고용인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 쌍용자동차의 문제는 참여정부 시절 외자유치라는 명분으로 상하이 자동차에 매각하면서 불씨를 키우기 시작했다. 먹튀 자본의 대명사인 론스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쌍용자동차의 매각에 심사숙고의 과정은 없었다. '위기 상황이 오면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철수' 하는 자본의 속성을 복기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적 물의가 심각하게 발생할 것이 뻔이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정부는 여전히 외자 유치를 경제적 선으로 선전하고 기업은 실적이 악화되면 정리해고를 바탕으로 한 구조 조정, 이도 안되면 정부에 공적자금 손벌리기, 이도 안되면 외자 유치를 가장한 회사 정리, 경영진 보너스의 시나리오를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어느 지점에서나 피해는 노동자에게만 전가된다.

지난 26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용역업체 직원을 동원하여 노조가 시위 중인 공장에 진입 했다. 특징적이게도 비해고 노동자 3천여명이 사측의 진입 작전에 동원 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노동자는 '자본으로 부터 소외된 소수적 존재' 다. 그들에게 정서적 연민과 운동적 연대가 없다면 그들의 존재는 결코 개별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다. 그의 생활, 가족, 남은 삶에 대한 안전망을 두루 살피고 어루만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은 없다. 하지만 그런 자본이나 사용자가 있을 것이란 착각은 거대한 기대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일까, 이 처절한 노노 갈등에서 '회사가 살아야 하지 않겠냐' 는 구호가 '함께 살자' 는 구호를 압도 했다. 비해고 노동자들은 스크럼을 짜고 공장에 진입 했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조직적으로 깨지는 이 순간을 조종하며 사용자는 수많은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연대도 못하냐는 근원적 비아냥에서 부터 쌍용차가 정상화 된다 하더라도 노조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어용으로 조직될 가능성마저 높다. 정상화가 되지 않는다 해도 남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유린한 비열한 밥그릇으로 해고 노동자를 깎아 내릴 수도 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갈등의 골을 통해 투쟁의 대오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하물며 파산에 이를 경우 비해고 노동자들이 사측을 대변할 수도 있다. 여론은 불 보듯 악화된다. 물귀신들이라고.

쌍용자동차 문제는 참여정부의 실수를 이명박정부가 설겆이 하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전 정권의 불씨라고 하여 현정권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나 극우보수, 신자유주의 정권에서도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하는 노동부, 복지부, 환경부 따위의 관계부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사간 문제에 있어서 노동부는 지혜와 중재를 보태기는 커녕 매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물며 무관심과 무지로 '노사간의 문제', '그들끼리 해결' 이라며 어떠한 접근도 않는데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근대 국가 내지는 공화국인지 정의가 안되는 수준이다. 정부가 벌인 일을 정부는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 고유의 거버넌스가 여전히 날카롭게 주입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정부가 하는 일은 사적 기업의 경영보다 휠씬 악랄하다. 그들의 고유한 지혜이며 국민이 위임한 권리인 규제와 중재를 공평하게 적용하지 못하고 한쪽의 일방적인 해체만을 염두에 두고 공권력을 위시한 작전만을 벌인다. 온갖 물자와 인력을 동원한 국가의 작전에서 노동자가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설령 이러한 물리적 기능이 작동되지 않더라도 법률적으로 기업을 청산할 수 있다. 역시 또 다른 외자유치를 통해서 말이다. 기업이나 사모펀드가 하는 일을 정부가 앞잡이로 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뿐만 아니라 그 나이의 대다수 노동자와 도시근로자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삶 자체가 전속력으로 파탄에 이른다. 기업은 노동자를 그들 삶에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업에 복무하는 기능으로 파악한지 오래다. 한술 더 떠 사회 구조는 오십이 넘으면 노동력을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 공동체를 이루고 연민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쌍용자동차의 노노 갈등을 목격하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당한 일이라면 나에게도 일어 날 것이란 순환고리가 처참하게 깨져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자본의 선의를 바라고 행동한 비해고 노동자들은 또 얼마나 불안할 것이며 같은 노동자를 내리치던 해고 노동자들의 눈은 얼마나 떨렸을까 말이다. 이런 사태를 방관하며 방패를 풀었다 막았다 를 반복하는 정부의 심장은 얼마나 악질적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해고 노동자들은 세상으로 부터 스스로를 봉쇄하고 농성 중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한차례 휘몰아 쳤다. 비해고 노동자들에게 양심을 탓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삶을 어느 누구라도 멋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해고 노동자와 같은 절박함이 있다. 금번의 물리적 충돌은 분명 사측에 의한 동원일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쌍용자동차의 사측이란 법정관리 중인 정부라는 끔찍한 사실관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정부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물리적 정서적 대립으로 인해 이들이 다시 '함께 일할' 수 있을지, 그리하여 회사도 살리고 그들 스스로도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들끼리 내일의 도모를 스스로 내동댕이 치게 만든 이명박정부의 듣도 보도 못한 고도의 노동 전략이 전술로 확인된 것이다. 이것은 설령 기적적인 타협이 일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상적일지 알 수 없게 만들고 그로 인해 다시 죽도록 일해야 하는 노동 관성을 되살려 회사의 채산성이 확보되면 다시 매각하는 과정을 거치려는 모종의 도발이 짙은 냄새를 풍긴다.

지금 이 순간 공장을 봉쇄했지만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주시하고 있을 해고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불안과 자괴에 소름 돋을 비해고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사회적 압력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들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그들이 오늘을 사는 것은 숨과 물이 아니라 감옥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과 사회적 관심 뿐이다. 그들이 살면 비해고 노동자도 회사도 산다. 그들이 살면 점진적으로 우리도 산다. 그 같은 일이 우리에게 그리고 회사에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9/06/29 18:33 2009/06/2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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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의 군복

2009/06/26 15:26 / 생각
전투복(군복은 사재말이다.)을 입으면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웠다. 자대 배치를 받으면 선임들이 입고 남겨둔 전투북을 한두벌 받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작업복이라 불렀다. 훈련소에서 받은 전투복은 A급으로 취급하여 휴가 갈 때 잘 다려 입고 나가려고 짱박아 둔다. 낼세운 다림질은 휴가용 전투복에나 하지 부대 안에서 입는 작업복에는 그따위 공을 드리진 않는다. 그 날선 전투복을 사재에서 멋있게 봐주지도 않는 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휴가 전날 열심 다림질이다. 대게는 지급 받은 전투복으로 군생활을 마치지만 게중에는 사재 군복을 5만원인가 6만원인가 주고 사는 사병들이 있다. 거저 받는 전투복보다 약간은 색깔 빠진 듯한, 뭔가 파스텔톤에 가까운 얼룩무늬에 바지는 통이 넓어서 편하기도 하고 다림질로 날을 세우면 전투복이 아니라 조금은 기성 패션화된다. 어디까지나 그들끼리의 생각이다.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내고 사회에 복귀하고 극히 정상적으로 생활하다가 1년에 한두번씩 있는 예비군 훈련을 가려고 전투복을 꺼내 입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다리는 자연스럽게 짝다리가 된다. 평소에는 눈도 못 쳐다 보던 여성의 다리를 훌터 내리는 눈엔 온갖 마초끼가 철철 넘친다. 예비군 서넛이라도 됐으면 '유후~' 하는 감탄사도 내봄직하다. 그야 말로 제대로된 유니폼 증후군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이 얼룩무늬 안에 갇히면 근거 없는 서서쏴의 자신감을 가진다. 도무지 앉아쏴들이 알 수 없는 모종의 연대마저 느낀다.

요즘 할아버지들이 전투복을 입고 여의도며 덕수궁을 순회하며 그 모종의 연대를 실현하고 있다. 어떤 노년의 외로움의 발현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어처구니가 없다. 모든 현실의 잣대가 좌파척결에 있는 늙은 마초들의 덩어리에서 그 옛날 몇몇 전우(?)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만날 지 모를 사재 여성의 호기심에 들기 위해 사고 다렸던 사재 군복의 컴플렉스를 본다. 군대라는 것이 개개인적으로는 온통 열등에 쌓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돈많은 애들은 면제 받고 사회에서 자기보다 앞서서 공부하거나 경력을 쌓을 텐데, 여자친구는 짧은 머리보다 긴머리에 컬이 출렁이는 멋쟁이와 눈맞아서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열등과 불안을 애국과 계급으로 승화시키는 조직이다. 할아버지들이 다시 군복을 입고 돌격 명령을 기다리는 것은 애국도 계급의 지배적인 인식도 아니다. 다만 전역 후에도 그들의 삶이 군대와 다를 바 없이 온통 불안했고 열등했다는 반증이다. 왜 그랬을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언제나 친북좌파척결로 귀결된다. 격결만 되면 로또라는 생각, 뒤집지 못한다. 따라서 군대나 사회나 별반 다를게 없으면 차라리 전투복을 입고 컴플렉스라도 분출하는 편이 여생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는가는 계산은 응당 가능하다. 다만, 예의와 공경에 대한 단어적 의미를 규범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안쓰럽고 우려스럽고 그렇다. 게다가 경찰이 저런 덩어리를 대하는 태도란, 열등의 연대 인식이 얼마나 감염이 빠른 신종플루인지 가늠이 되고도 남음이다.
2009/06/26 15:26 2009/06/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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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홍대앞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와 산학협동 차 만나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산학협동이 협동이란 긍정적 수식 명사로 정서적으로 평등하게 보이고 매우 실천적인데다가 산학이란 빛 좋은 약어로 인해 실용의 트랜드마저 느껴진다. 산학협동은 엄밀히 말해서 산학협상이다. 학생들의 등록금은 올려 놓고 학자금 대출 이자를 줄여 주는 시장 원리가 산학협동 안에 그대로 작동한다. 만면에 온갖 가식의 지성과 마치 이익을 사회환원 하러 나온 듯한 표정으로 학교를 걱정하고 기업을 걱정해 주며 화답한다. 얄팍한 고기를 익히는 젓가락질이 칼날 부딛치듯 소리를 내고 얄팍한 미덕이 저마더 얼굴에 번질번질 셀로판지를 깐다. 얼마나 얇은지 술 몇순배 돌자 죄다 찢어지고 만다.


솔직히 우리 학교 애들 수준이 너무 낮아요. 솔직히 요즘 애들 근성도 끈기도 없어서 사회에 내보내도 되나 할 정도에요. 그렇다고 오프라인에 보내려고 하니 요즘 오프가 정말 말이 아니어서 보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학교에선 온라인 교육 보다 오프라인 교육에 아직도 열을 올리니.. 꼭 인턴 또는 학교 다니면서도 애들 빼서 기업에 넣어 드릴 수 있어요, 돈을 안주셔도 되요 괜찮다 싶으시면 그때 주셔도 되고 채용하시면 더 좋고요.

아시겠지만, 기업에서 산학협동을 하겠다는 것은 우수 인력 확보,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 알고 계시죠? 아니 모 인턴은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주는 것이고 그냥 이쪽으로 출근하는데 교통비 점심비도 없이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하면 저희도 불편해요, 적지만 어느 정도는 책정해서...


얄팍한 고기덩어리가 빨리 익어서 다행이다. 그날 구토가 나서 힘 닿는대까지 술을 마셨다. 어쨌든 학생들을 만나 케리어패스가 어떻고 사회가 만만치가 않아 따위의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헤어졌다. 수준이 높고 낮은 학생들을 정해 놓고 만나 본 적이 없는터라, 일단 만나보고 그 수준이란 지표가 어떻게 정해지고 초중고에서 말하는 변별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서로 순수한 마음이 없다보니 산학과 협동에 대해 주관적 견해나 집단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데 급급하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가선 이쪽에서 겸임도 가능하다는 투로 오해될 소지가 있고 이쪽에서는 협동기금을 마련해서 학생들에게 소정의 급여를 줘야 한다는 왜곡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 학교가 그렇게 잘났나? 는 반응이 심장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이 학교가 이른바 Sky 반열에 들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어쩌면 나와 기업은 더 순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아가 수준이 낮은 애들이 있다니 다행이고 산학협동을 통해 그 애들에게 희망과 케리어패스를 얘기해주겠다며 설레발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단이 우수하다고 판단되면 개인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지는데 -변별력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우세한데- 반해 집단이 허접하면 개인의 우수함을 판단하는 변별력은 기능하지 않는다. 이런 방정식이라면 수준이 안되는 집단에서 개인의 우수함을 판단하여 기업의 인력화 시킨다는 발상은 큰 오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산학협동의 순진(?)한 목적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익혀 먹은 샤브샤브 한바탕에 피해는 교수도 나도 아닌 학생들이 본 셈이 됐다. 그 잘난 호주산 소고기 한 점 입에 대지도 않았고 제 삶과 꿈이 따로 있을 애들은 졸지에 수준 낮은 부류로 취급 당했다. 나와 같은 기성세대가 이 사회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놓고 애꿋은 20대에게 도전정신이 어떻고 끈기가 죽었다고 맨날 떠들어 대는 내 안에 사이비는 얼마나 악랄한가. 기업의 철저한 시장원리에 비닐을 덮고 비쳐지지 않는 양 희망을 판서 하는 것이 얼마나 비양심적인가. 남은 것은 학교의 특징, 직업의 특성, 어쩔 수 없는 기업의 이익추구 따위를 들먹이며 결국 목구멍의 명령에 주눅 든 밑도 끝도 없는 속물의 항변 뿐인 것을.

2009/06/22 16:29 2009/06/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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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과 공성진

2009/06/19 16:34 / 동물
한 분은 여성이고 한 분은 남성이다. 한 분은 서울 중구를 한 분은 서울 강남구를 대표한다. 광장이 있는 중구는 '국민이 미디어에 관한 한 뭘 모른다' 고 하고 광장이 없는 강남구는 '광장 따위에서 무슨 민주주의' 냐고 한다. 이 두 분 다르지만 같은 분이다. 국민은 무식하고 민주주의는 자기들만이 지키거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는 다르지만 같은 머리를 달고 다닌다. 그래도 이들이 다른 신체 같은 머리로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최장집 선생의 말 대로 우리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고 정당이라는 자율적 결사체가 삶의 이익과 요구를 정책과 법으로 반영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성진이 어제 100분 토론 중 송영길에게 인천을 대변하면 된다는 취지의 묘한 발언을 했다. 같은 당 같은 머리의 의원들도 미디어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역시 묘한 취지의 발언을 한 나경원의 대변은 중구만의 것인지 묘해진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레벨이 이쯤 되면 미디어법이 아니라 한창 뜨고 있는 개헌 논의를 광장에서 해야 한다. 권력구조만 바꾸는 '원포인트 개헌' 이 아닌 대의제 민주주의를 과감히 손대는 대안적 민주주의에 대해 논의 되어야 한다. 품위 있는 언어를 집어 치우고 나경원과 공성진 처럼 같은 머리 다른 신체의 괴물들에게 정상적인 머리를 각각 돌려 줘야 한다. 대의건 민주주의건 간에 머리는 정상이어야 하지 않은가. 물론 계속 비정상적이길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욕하는 것도 피곤하니까.
2009/06/19 16:34 2009/06/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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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생각해 본다.

2009/06/18 15:33 / 생각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의 습득과 사고의 확장은 일상 생활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교육은 가정, 일터 등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반일리치는 '탈학교론' 에서 학교가 교육 자체와 제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사회의 교육은 대체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행되는 기능으로 국한 된다. 이러한 한계가 교육을 형식적으로, 빈부와 지역간 격차, 학벌주의를 조장함으로서 실질적인 인간 교육을 시키지 못하도록 한정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반일리치의 학교를 떠나라 - out of school - 라는 다소 과격한 주문은 현대 사회의 서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이다. 교육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나 학교를 떠나 수행될 수 있는 교육을 일반 대중들이 감당하기에는 현대 사회가 그 비용과 시간을 호락호락 내주질 않는다. 그런 까닭에 공교육이란 이름의 제도적 체제가 존재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는 리트머스는 교육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좌, 우 이념이 현실과 가장 첨예하게 갈등하고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비웃으며 기득권을 활용한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경쟁이 더 치열해지길 바란다.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교육을 경멸하며 교육에 대해 성찰하며 비인간적 사회구조를 비판하지만 결국 티 안나게 사교육에 빠진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문제를 대체로 공교육의 비현실, 사교육의 고비용으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독성이 사회로 흘러 들어와 엉망으로 만드는 순환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비현실적인 곳에서 자녀를 교육 시키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 따라서 좌파나 우파나 이 순환고리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비용을 감내할 수 있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되었다. 교육의 문제는 결국 대결 구도 속의 비용의 문제일까.

한국 사회에 있어서 교육의 문제가 비용 측면으로 다뤄지는 것은 제도권 교육, 이른바 교육의 사회적 안전망인 공교육의 퀄리티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안전망을 찢어 버릴 수도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마인드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마인드는 계몽과 각성만으로도 충분히 반성되고 실천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 마인드가 요구하는 것은 '각오' 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위해 운전면허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의 1종과 2종은 필요에 의한 기능으로만 작동하지만 일반고와 특목고는 '목적' 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이 제도 안에서 변별력과 수월성에 의하지 않고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교육은 더욱 더 안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도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개인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나 안다. '각오' 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치적이어야 하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제 주제를 아는 수 밖에 이 사회를 비춰보고 있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떻게 이명박이나 공정택을 그렇게 욕하면서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1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물음은 그 자체로 지나치게 순수하여 폭력적이다. 경쟁을 빌미로 공포를 확대하는 보수정치인이나 사교육기관의 마케팅의 악랄함과 맥락을 같이 하는 좌파적 근본에서 어떤 부모도 그 자신과 자녀를 해방시킬 각오는 하지 못한다. 좌파적, 사회주의적 신념을 쫒는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학원을 모두 국유화하지 않고서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이전의 자연적 교육관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러한 상투적인 물음조차 패배자 처럼 느껴진다. 교육을 때려 칠 순 없고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알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느낀다.

2009/06/18 15:33 2009/06/18 15:3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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