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타인의 취향이지만, 미술관 앞에서 디카질하고 그 유명한 전시회 갔다 왔다며 싸이에 사진을 등록하고 퍼가기를 기다리는 낚시꾼들조차 미술관의 미술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얘기할 줄 안다. 사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든 작품에 진지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모든 작품에 무슨 거대한 철학이나 작가의 실존적 무게가 세심하게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유명하기만 했지 잭슨폴락의 행위 페인팅이나 칸딘스키의 구도을 이해하는 부류가 많은 것도 아니다.

타인의 취향이지만, 목적은 간결하다. 레벨 있는 소비생활의 자랑이 우리 나라 미술관과 미술관에 걸린 고가의 작품들의 목적이다.(이것은 전부는 아니겠다. 연애의 목적도 있고..) 물론, 이러한 목적은 작가나 작품이 만든 건 아니다.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타인의 취향으로 방치된 대중들의 태도로 만들어진 우리만의 현상이다. 다른 OECD 국가도 그런가? 글세다.

어쨌든 이러한 타인의 취향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예술도 돈으로 계산된 셈법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이 작품이 조성할 수 있는 비자금의 규모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을 보고 형식적 유희에 만족하고 끝낼 수 밖에 없는 팝아트라는 예술사조가 있다. 이것도 타인의 취향인지라 누구는 앤디 워홀을 보며 눈물까지 흘린다고 하고 낸시 랭을 추종하며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복제한다니 역시 취향은 취향이다.

우리나라는 예술이나 정치나 가리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취향에 봉사하는 사회다.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이 삼성가에 들어 갔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오래 걸어 두고 한사람의 취향에 봉사하기에는 좀 지루한 그림 같은데 무려 90억인가? 일찍히 프랑스에 있는 스키장 슬로프를 통채로 임대해서 스키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취향 한번 거대하다. 이쯤되면 짐짓 진지한 척하는 자세는 봐줄만하다. 어쨌든 타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이런 타인의 취향도 방치해야 하나?

2007/12/07 18:10 2007/12/07 18:10
DrunkenSTAR 이 작성.

스스로 본인의 그림에 상징이 없고, 어떠한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다고 말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뜨의 그림 앞에 서면 정작 '무슨 의미일까'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실을 창조하는 데는 과거의 일에 철저히 관심을 끊는 방법이 있다. 보이는 것을 믿고(믿는다고 생각하고), 현실의 실제적 사물을 자각하는 것은 과거의 현상을 미메시스 하는 행위일 뿐 창조의 행위는 아니다. 눈에 대한 적응력이 진리 보다 우위에 있는 현실주의적인 우리들은, 과거를 모방한 현재의 믿음에 해석을 달리하거나 새로운 언어로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사물이 주는 교훈에 충실하기만 해도 상식적인 사람으로 오늘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사물을 고전적으로 이해하고 언어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성이나 초전도적인 유행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일단 믿어 보고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는 믿음과 합리화의 황홀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러한 부류의 관심은 전통에 있기 때문에 미적 관심 보다는 예측 될 수 있는 의미 관심에 더 민감하다. 앞과 뒤가 없고, 안과 밖도 없는데다가 심지어는 새와 잎이 한몸인 마그리뜨의 그림에서 전통의 반응은 대체로 희안함이거나 괴리일 것이다. 애써 아는체를 해보아도 작품과 나 사이에 좀처럼 괴리감이 가까워지지 않을 때 현실과 소외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현실주의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일까? 마그리뜨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며 칼리그램을 한다. 온통 이치에 맞지 않고 직관되지 않는 현실속에 존재하면서도 그런 존재자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한계를 구원하기 위해 마그리뜨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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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 1926
캔버스에 유채
139.5 x 105.5cm
어떤 머리틀을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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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1964-65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더비 해트도 아니고 파이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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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추구, 1963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죽은 물고기는 생선이다.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위에 진실이 묶여 있고 진실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죽은 것을 살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은 재현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죽은 것을 통해 현실을 보게 되면 그때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만 믿어도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일차원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현되기가 실로 어렵다. 노빠의 좌파신자유주의의 낯설게 하기가 그랬고, 황빠의 말씀만으로 존재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그랬다. 보이는 것 자체가 저열한 분열을 일삼았고 광기만을 지닌 텍스트들이 난무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량, 감당하기 힘든 패러독스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치 말아야 할 세계가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우상안에 갇히기를 원한다. 편안한 세상, 안락한 금가르기의 현실에 필요한 건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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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바다, 1951
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그럼, 여긴 바다속??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공화국 정부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피카소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편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이나 큐비즘이 부르주아지적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에서 비롯 됐다는 점에서 대게의 큐비즘 작가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예술적 영감에 의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독재에 저항하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파괴를 창조의 미덕으로 삼고 평화를 권력의 반동으로 연관지었던 시대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양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결집을 만들어 냈으며 정치적 준거로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열정이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을 망치거나 분열시키고 가족들 마저 그를 경멸하는 것을 읽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점령한 열정적 젊음과 좌파 지향을 한없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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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349.3cm * 77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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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2007/04/15 04:02 2007/04/15 04:02
DrunkenSTAR 이 작성.

Monet, Claude

2006/01/02 23:56 / 관심/페인팅
"IF MONET IS REGARDED AS THE IMPRESSIONIST par excellence, one must admit that both Degas and Renoir also have their own special qualities. Cézanne, too, merits individual study, although his development in relation to later art seems to set him somewhat apart from the Impressionist movement as a whole.


Claude Monet(1840~1926)
1874년 4월, 파리 시민들은 대상 없는 회화에 경악했다. 덕지덕지 찍어 뭉갠 듯 한 어느 소녀에 한숨이 나오다가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돌린 듯한, 대상을 재현하는 섬세함이란 찾아 볼 수 없는 해돋이(Sunrise)에서 그동안 아카데미가 쌓아온 명예는 다시금 전통의 이름으로 회복되어야 할 순교자가 되었다.
싸롱의 벽에서 팽개쳐진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드가, 시슬리는 그들의 "눈으로 본 세계의 인상" 을 35 boulevard des Capucines 에 있던 Nadar 의 스튜디오에 건다. 싸롱전으로 대변되던 아카데미의 권위에 콧방귀를 뀐 인상주의 화가의 첫번째 전시회다. 잘 알려진 얘기대로 루이 르르와 라는 기자에 의해 씌여진 인상주의는 모네가 발표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못참을 만큼 경멸스러운 Impression: soleil levant (Impression: Sunrise) 에서 비롯됐다. 물론, 르르와가 이 반항아들에 대해 고운 기사를 썼을리 없고...

The First Impressionist Exhibition 1874

Auguste Renoir and Monet worked closely together during the late 1860s, painting similar scenes of popular river resorts and views of a bustling Paris

[Dancer]



[Impression: Sunrise]


유명하기는 모네나 르느와르지만, 첫번째 인상주의화가이면서 최연장자로 남은 피사로를 플래시백하며 화가이자, 화상이며, 수집가인 Eugène Murer 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Living in Saint Thomas in 1852, [although] employed in a well-paying business, I could not endure the situation any longer, and without thinking, I abandoned all I had there and fled to Caracas, thus breaking the bonds that tied me to bourgeois life. What I suffered is incredible, but I have lived: what I am suffering now is terrible, much worse even than when I was young, full of zeal and enthusiasm. Now I am convinced that my future is dead. Yet I think that if I had to start all over again, I would not hesitate to follow the same path."

The First Impressionist Pissarro
http://www.artgallery.nsw.gov.au/sub/pissarro/home.html

모네(인상파는)는 대상의 재현을 실현하는 고전주의의 눈을 버린 최초의 현대적 카메라 옵스쿠라의 소유자였다. 현대적 눈에 비친 세계의 시뮬라크르가 인상주의적 미학이었다.
명확함이 없는 세상, 빛의 조화에 변하는 견고한 대상과 관습적 바라보기에 대한 새로운 조망(New Painting)은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먼저 건져 올렸던 것이다. 같은 대상을 빛과 시간에 관계 없이 받아 들이는 고정관념은 더 이상 현대의 자각이 아니다. 위계 없는 계열, 견고 없는 차이를 거친 터치로 그렸던 현대적이며 공화적인 최초의 화가들인 셈이다.


MONET, Claude
The Red Kerchief: Portrait of Camille Monet
probably late 1860s - early 1870s
Oil on canvas
99 x 79.3 cm (39 x 31 1/4 in.)
The Cleveland Museum of Art



MONET, Claude
Boulevard des Capucines
1873
Oil on canvas
79.4 x 59 cm (31 1/4 x 23 1/4")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City, Missouri



MONET, Claude
The Beach at Trouville
1870
Oil on canvas
38 x 46 cm (15 x 18 1/8 in.)
National Gallery, London
2006/01/02 23:56 2006/01/02 23:56
DrunkenSTAR 이 작성.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숭고한 사람들이 잠시 그런 공포스러움을 버리기 위해 틈틈이 모여드는 파주 헤이리에 가면, '씨앗을 뿌리다, 가장 위대한 예술은 자연이다' 는 푯말이 있다. 뿌린 씨의 정체를 갸우둥하기도 전에 공기가 다른 자연속에 가장 모던한 건축물들은 육중한 강압처럼 느껴진다. 특히, 일전에 갔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라보는 건축물이 위대한 예술의 자연스러움과 어울어지는 유일한 통로(대체로 문이나, 입구로 일컬어지는 물체)는 이걸 통해도 되는지, 차단하려는 육중함을 굳이 열고 소통해야 하는지, 쉬 분간되지 않는다. 씨는 뿌린자가 거두워야 제법 공평해진다. 헤이리의 건축물은 바라보기엔 멋드러져도, 씨는 뿌리고 나오보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불편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행여 그러겠냐만)
지어진 것들과 지어질 것들을 평균내더라도 한참을 벗어나 있지만, 헤이리는 나무 등걸의 예술가, 박수근를 닮았으면 좋았을 걸, 일부 아쉬움이 다시 헤이리를 찾게 한다. 박수근의 그림이라면 가장 빈곤한 질감에 가장 평범한 노동과 가장 보편적인 가난의 터치로 일컬어 진다. 다시 말해 '가장 힘들어 보이는 평범' 에 대한 시각이다. 대상들은 그냥 앉아 있거나, 돌리고, 이고 간다. 그것이 바로, 밥벌이가 가장 숭고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로써 작용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그릴게 참 없었나보다며 박수근을 위로하기도 한다. 간편한 소통, 박수근의 그림이 오래도록 놓고 보아도 밥 맛처럼 이도저도 아닌 느낌으로 남는 이유다. 자연에 모더니즘의 씨를 뿌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과 박수근을 빗대어 위대함의 경중을 따지는 건 상대적 가난에 시달리는 동시대인의 피곤을 가중시킬 뿐이다. 모든 사는 건, 맷돌을 돌리며 구깃구깃 해지는 과정일 뿐, 뿌린 자가 거둔 밥이라면 그 맛이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나... 그리 밋밋한 맛이 한대를 가고 두대를 이어가는 맷돌 돌리는 삶이야 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구삼 미술관에서 구입한 '맷돌 돌리는 여인' 박수근, 1940, 하드보드 유화,
판화로 300점 한정 중 13번째 작품
2005/11/07 17:59 2005/11/07 17:59
DrunkenSTAR 이 작성.

Hundertwasser

2005/05/04 01:10 / 관심/페인팅
화사한듯, 찬란한듯 하지만 서울의 봄은 도처에 모순 투성이다. 본래의 색을 내는 물질은 찾아 볼 수 없다. 햇빛 아래 발가벗고 서 있어도 내 그림자는 검지 않다. 무엇하나 생명의 세계가 아닌 굴절된 현대의 구축, 누구도 서울을 상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동화를 꿈꾸지 않는다. 빈틈없는 공학과 엄숙한 조형으로 서울에선 다른 곳에서 그려온 감성의 색과 다른 곳에서 복원된 동화를 전시만 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불쾌한 이성만으로 조립된 도시에서 오로지 행복이란 야수적인 왜곡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세계를 표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세계안에 넣어 광포하게 왜곡할수록 행복해지는 것, 이 도시에서 보통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겸 화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 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 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오스트리아 빈의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ouse)다. 빈 시내 헤츠가세역 근처에 있는 이 연립주택은 삭막하고 특징이나 국적 없는 현대주택을 지양하고,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건축물을 목표로 하여 과거 왕이 살던 위엄 있는 왕궁과 같은 대중의 집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강렬한 색채와 서로 다른 모양의 창틀, 둥근 탑, 곡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등이 조화를 이루며, 스카이라인이 신과 사람을 맺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생각 아래 중요시 하였다. 훈데르트 바서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비튼 마을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Hundertwasser House
1983-86 Vienna

인간이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세상의 진실로만 살아 가는 것은 얼마나 미덥지 않은가? 자를 대고 그린 선이 아니라 크레용으로 그린 가건축물은 진실이 아니라며 도태시켜버리는 파쇼의 도시에서 우리는, 훈데르트 바서의 호기심을 이미지로 저장하여 킨코스나 링코에 가서 확대 프린트하여 액자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조금은 디오니소스에 위로가 된다.


The 30 Day Fax Picture 1994
Mixed media (thirty A4 size FAXes)
151 x 130 cm Vienna

훈데르트를 반문명주의자, 생태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는 사람이 보통으로 자신의 세계를 꿈꾸고 표현하는 것을 지향했던 사람이다. 세계의 한계가 세상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았음을 형식으로 보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
훈데르트 바서는 그 자체가 미궁의 도시였고 아날로그 였다.


Kunsthaus Wien - Blue Version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하우스(Kunsthaus=개인화랑)


Last changed on 01/28/05. This album contains 2 items.
Island of Lost Desire. Mixed technique (1975), 59 x 48 cm.
Private Collection


Les Emanations - The Emanations 1999
Mixed Media : watercolor, egg tempera, oil, sheets of gold and silver
SIZE: h: 112 x w: 140 cm / h: 44.1 x w: 55.1 in


http://www.hundertwasserhaus.at/1st.html


2005/05/04 01:10 2005/05/04 01:10
DrunkenSTAR 이 작성.

먼저, 나는 사진에 대해서 잼병이다. 몇년전에 구입한 Nikon 885 가 차 뒷좌석에서 랜즈 덮개를 잃은 채 뒹굴고 있는 상태로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리라 본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에 대한 오마주에서 비롯된 독서로 보는 것이 맞다. 롤랑의 신화나 기호학은 그의 세계관과 공명하여 언제나 접근 불가능한 울림을 그나마 엿듣게 하곤 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에서 Robert Frank 의 'Parade' 라는 사진을 보다가 그의 사진전이 11월20일부터 김영섭화랑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레숑씨의 사진전을 비롯해서 올해 사진 대가들의 작품이 러시되고 있는 것은 금값이 오르는 사회적 현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지?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롤랑 바르트의 책은 어떤 것도 독자에게 쉽게 접근하고자 하는 미덕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텍스트들 뿐이다. 모두가 은유하고 환유하는 실존적 기호와 기의들이 난무한다. 그나마 롤랑의 유작이 된 카메라 루시다가 쉬운 편에 속한다. 카메라 루시다의 몇가지 구절에서 거추장스러운 사유의 편린을 제한하고 작살처럼 와 닿는 것은 그 증거가 된다.

"아주 오래전 어느날, 나는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Jerome, 1784-1860)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52년에 찍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이후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때때로 나는 이 놀라움에 관해 이야기 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잊어 버렸다."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밝은 방으로 이끌은 사진에 대하여 프랑스 최고 지성의 통찰력은 그대로 나를 찌른다. 앙투앙 와토의 '시테섬으로의 순례' 를 본 로뎅이 등장인물들은 에고를 지닌 제각각이 아니라 시퀀스를 두고 배에서 섬으로 순례를 하는 한쌍의 등장인물로 통찰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진과 그림이 지닌 단 한번의 세계 형상이 실은 무한히 지속적인 놀라움을 부활시키는 실존적 표상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게 해준다. 이것이 롤랑이 말한 푼크툼(punctum)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은 모르겠다만...

한달 전쯤, 최근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에서 얀 베르메르가 목재로 만든 커다란 암실로 그림를 투영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것은 카메라 루시다의 반대인 어두운 방 즉, 카메라 옵스쿠라 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미술의 거장들은 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빌려 투영된 물체를 온전한 작품 세계로 끌어 들이는 예술 작업을 했다.
협소한 의미에서 물질에 투영된 정신세계가 미술이라면, 물질에 투영된 자연세계는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얀 베르메르를 비롯하여 렘브란트, 알브레히트 뒤러 등은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서 정신과 자연의 세계를 동시에 투영하는 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온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데이빗 호크니는 결국 미술이란 것은 화가의 정신이나 눈썰미가 아니라 기계적 투영의 반영일 뿐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사진학을 전공한 친구가 많이 찍는 사람을 당해낼 수는 없지, 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찍고 보는 것에 잼병인 내가 일단 사진을 보는 것의 새로운 사유,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와 비슷한, 고독으로 이루어진 삶의 고찰, 언제나 고독스러운 사진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실존의 의미, 그것에 접근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학문도 어떤 동사(Verb)를 많이 경험하고 사색한 사람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진이 가르쳐 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WATTEAU, Jean-Antoine
The Embarkation for Cythera
1717
Oil on canvas, 129 x 194 cm
Musée du Louvre, Paris
2004/11/12 18:15 2004/11/12 18:15
DrunkenSTAR 이 작성.

Chagall, Marc

2004/10/25 22:49 / 관심/페인팅
끝내 샤갈 전시회는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주제로한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화를 떼어 왔을리 없는 전시회였을테니 별반 후회는 없다.(아니, 아주 없지는 않다.)
샤갈에 대한 잘못된 소문 3가지를 든다면, 하나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이건 너무 기초적인 진상규명이겠지만, 태생과 성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하나는 표현주의 화가라는 것(이건 미술 평론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듯, 이를테면 라파엘로가 르네상스적이라기 보다 마니에리스모적 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와 비슷할 듯), 하나는 샤갈의 그림중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이라는 작품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 샤갈은(Marc Chagall)Russian-born French painter 이고, 표현주의라기 보다는 큐비즘에 가까운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작품은 없고 시인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란 시는 있다.
소문의 진상(?)을 밝히고 샤갈의 대표작중에 하나인 I and the Village(1911)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을 대입, 비교해 보았으나 억지 주장이 아니면 이 또한 관계가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시인이 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나 파리 근교의 몽파르나스에 가보고 기의 한 것인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나와 마을'의 눈꽃을 보고 시적 감흥에 매료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형상체로는 도무지 세계와 대입이 불가능한 어떤 정신적 붓질인 추상표현주의의 저널리즘적 억지 주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주제이긴 하다. 하긴, 표현주의, 큐비즘 등이 추상표현주의를 낳게된 주춧돌이라고 하니 아주 연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겠다.
샤갈 특별전에 붙은 색체의 미술가라는 타이틀 또한 일종에 추상표현주의의 친구인 저널리즘의 횡포다. 샤갈의 작품이 색체에 있어서 공간의 변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원근감 마저 색체에 근간(I and the Village / The Flying Carriage)을 두었다는 것에서 색체의 미술가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작품의 다양한 감상에서 색체의 고정관념은 샤갈의 태생과 성장에 있어서 착취와 억압의 배경, 그로인해 표현되는 슬픈 따뜻함의 역설(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통렬한 공간구조속에 놀라운 사랑의 설득력(Birthday) 등을 폭넓게 음미할 수 없도록 여백을 줄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anyway!!
명작을 진품으로 보는 기회는 일생에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니다.



1913-1914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1913 [The Flying Carriage]


1915 [Birthday]


1911 [I and the Village]
2004/10/25 22:49 2004/10/25 22:49
DrunkenSTAR 이 작성.

1500년 ~ 1700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생활의 소리로 인해 죽었던 감성의 고막이 트인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는 실은, 네덜란드의 화가 요한슨 베르메르(Jan Vermeer)가 그린 그림에 대한 얘기다.
어디를 찾아봐도 얀 베르메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로 표현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는 것처럼 내성적이고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소심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르네상스의 물결이 닿지 않고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예술의 패트런들, 즉 영주나 교황과 친분이 없었던 것도 그가 잘 알려지지 않게 됐던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산치오 라파엘로 같은 인물은 수많은 제자를 거닐고 다니면서 교황청과 성을 오가며 사교를 즐겼다는 것을 보면 대비가 가능하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에는 불세출의 꽃의 화가 램브란트가 있었다는 것도 그가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게된 동기가 아닐까? 평생 35점의 작품을 남겼어도 21점을 오직 한명의 패트런을 위해 작품활동을 한 점도 한몫했을 수도 있겠다.(영화에서 베르메르의 패트런은 색광에 파렴치한으로 나온다.)

빛이 투영하는 색깔의 범위를 붓의 몸짓으로 표현한 베르메르는 화풍으로 본다면 바로크적인 빛과 르네상스적인 색깔의 화가였던 것 같다. 상당수의 그림이 시점만 달리 할뿐 그의 아틀리에를 배경으로 그려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영화의 도입부는 '화가의 아틀리에' 라는 작품을 연상케하는 소품들이 가득하게 펼쳐진다. 가냘프게 빛이 스며드는 모자이크 창문과 그에 반은 어둡고 반은 먼지가 얻혀진듯한 네덜란드 지도, 헝겁들이 널려 있는 탁자와 상젤리제, 이젤... 오페라를 보기전에 아리아를 듣고 가는 것처럼 그림을 한번이라도 보고 간 사람이라면 절로 탄성이 나올만 하다.

진주 귀걸이를 할 그리트에 대한 베르메르의 연민이 중세 특유의 생활의 소리와 퀄트 되면서 예술과 예술의 소품에 대한 신비감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튜브에 담겨진 물감이 없는 당시 색을 만들기 위해 식물, 광물질들을 섞어서 만드는 과정과 필시 잔 강에서 기어올린 물로 붓을 닦아내는 장면들은 예술이 '물질에 투영된 정신세계'이며 그때 존재하는 질료들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난했던 고흐가 가질 수 없었던 베르메르의 상대적 부유 같은 것 말이다.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가 원작이긴 하지만 헤이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영화속의 그림, 베르메르의 작품은 '터번을 두른 소녀' 로 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의 어떤 아름다운 부정, 절제, 연민의 정을 보고 있자면 왕가위의 '화양연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최근 열린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한 왕가위의 신작 '2046' 이 화양연화의 연작이라고 하니 그도 꽤 볼만하겠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터번을 두른 소녀]



[화가의 아틀리에]
2004/10/10 20:11 2004/10/10 20:11
DrunkenSTAR 이 작성.

Hopper, Edward

2004/09/15 18:28 / 관심/페인팅
미국회화의 조류는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제 대공항이나 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미국예술 전반은 빠른 반전과 시대상의 반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물론, 언론과 함께) 그 반전의 소용돌이에는 에드워드 하퍼, 잭슨폴락, 그리고 앤디워홀이 있다.
감상자는 권태에 대한 즐거운 망상으로 하퍼를 보게 될 것이다.



Nighthawks(밤샘을 즐기는 사람들) 1942
Oil on canvas 84.1 x 152.4 cm



Night in the Park(밤에 공원에서)1921. Etching



People in the Sun,(일광욕) 1960. Oil on canvas, 40 3/8 x 60 3/8 in. (102.6 x 153.5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Washington, DC, U.S.A.
2004/09/15 18:28 2004/09/15 18:28
DrunkenSTAR 이 작성.

시간이 남아 돌았던 나는 어제도 들렀던 우피치 미술관을 오늘도 8유로를 내고 들어와서, 3시간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를 감상하고 있었다. 보티첼리의 방에는 '프리마베라' 와 '비너스의 탄생' 이 같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두 작품의 캔버스 크기가 생각 이상으로 컸기에 훔쳐갈 궁리를 하는 시간도 장장 3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 궁리를 포기하고 1층에서 Guide 두권을 샀는데, 그건 피렌체 여행 내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사람에게, 기억의 의미로 선물하고 내겐 없다.

피렌체 공화국이 르네상스의 꽃이 될 수 있었던 건 메디치 가문의 패트런 정신 때문이다. 그런 메디치 가문의 궁전인 피티궁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베키오를 건너서 300 미터? 400 미터? 쯤 직진하면 소박한 궁전의 벽돌담이 보인다. 피티궁에는 팔라티니 갤러리가 있는데 이곳은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아 우피치 보다는 휠씬 한가했다. 메디치 가문의 개인 소장품들을 볼 수 있는 갤러리를 찾지 않는다니... 피렌체의 절반을 놓친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런 기대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사이' 에서 준세이가 자주 보러왔었던 라파엘로의 '성자와 성모' 가 있는 갤러리이기도 했으며 준세이가 복원중에 스승이 칼로 찢어 놓은 치골리의 작품들이 수십점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왈칵, 쏟아 질것만 같은 말초신경의 긴장을 애써 조여 잡으며 라파엘로의 '성자와 성모' 를 훔쳐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프리마베라'에 비하면 소품인 이... 진품...을 어떻게 하면...
따로 막아 놓은 것도 없고 주위에 감시(?)하는 사람도 없어서 500년전 라파엘로가 붓을 들어 채색을 했었던 길을 따라 감촉을 느껴 보았다. 첫사랑의 팔짱 같은, 절정의 느낌.
그래서 이렇게,
2시간쯤 절도의 궁리 끝에 훔쳐와서 여기에 진품을 전시한다.


2004/09/04 17:51 2004/09/04 17:5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