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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009/09/22 13:31 / 관심
요즘 김태원은 '부활' 로 보여지지 않고 예능인으로 자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웃긴다. 나는 박명수 팬이다. 박명수의 나이와 내 나이가 그게 그것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짜증 섞인 개그가 웃긴다. 마치 내 모습을 투영하듯 그 짜증은 곧 내 일상의 짜증과 같기 때문이다. 김태원이 그렇다. 그는 더 나아가 귀찮음을 소재로 활용한다. 게다가 그들은 신체의 허술함을 무기로 한다. 아버지로 국민할매로 자신을 조롱한다. 한창 사회에서 일할 나이라는 이유로 절제를 미덕으로 섬기는 끼인 나이의 그들, 그들과 비슷한 우리들도 때때로 부리고 싶은 애교와 엄살이 있다. 박명수와 김태원이 그걸 보여준다.

김태원은 이승철과 함께 부활 맴버다. 삼사십대 사람들은 부활, 들국화와 청춘을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김태원이 대마초로 걸려 들었을 때 나는 담배를 배웠다. 창작을 하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한 발언을 믿었다. 나도 한때 학교밴드를 조직했고 곡을 만들기 위해 술을 마셨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불렀다. 고만고만한 학교밴드에서 유행가를 재생하던 것 이상으로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사랑과 이별, 그 자체였다. 밑고 끝도 없이 이승철이 부활을 탈퇴한 것으로 믿었고 이승철을 저주했다. 이승철이 복귀 했을 때 다시 열광 했다. 김태원이 부활을 재결성하고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단 소식에 팔뚝으로 눈을 훔쳤다.

부활은 부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밴드다. 사회 생활을 하며 한동안 부활을 잊었었다. 그러다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다. 그때 부활은 '사랑할수록' 이란 노래를 발표 했다. 나는 이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됐다. 부활은 '위대한 밴드' 다. 삶의 목적이 있었던 시절마다 그들의 노래가 있었기에 그렇다. 인생을 반추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목격한 노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활은 위대하다. 그런 김태원이 예능을 하며 스스로를 조롱하고 엄살 부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그런 웃음과 감수성이 나오기 위한 자양분은 괴롭고 쓰디 쓸 수 밖에 없음을 모든 음표를 동원하여 보여줬다. 그것으로 엔드다.

지난 달 부활이 2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 했다. 그들은 또 부활했다.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2009/09/22 13:31 2009/09/22 13:31
DrunkenSTAR 이 작성.

어쨌든 타인의 취향이지만, 미술관 앞에서 디카질하고 그 유명한 전시회 갔다 왔다며 싸이에 사진을 등록하고 퍼가기를 기다리는 낚시꾼들조차 미술관의 미술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얘기할 줄 안다. 사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든 작품에 진지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모든 작품에 무슨 거대한 철학이나 작가의 실존적 무게가 세심하게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유명하기만 했지 잭슨폴락의 행위 페인팅이나 칸딘스키의 구도을 이해하는 부류가 많은 것도 아니다.

타인의 취향이지만, 목적은 간결하다. 레벨 있는 소비생활의 자랑이 우리 나라 미술관과 미술관에 걸린 고가의 작품들의 목적이다.(이것은 전부는 아니겠다. 연애의 목적도 있고..) 물론, 이러한 목적은 작가나 작품이 만든 건 아니다.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타인의 취향으로 방치된 대중들의 태도로 만들어진 우리만의 현상이다. 다른 OECD 국가도 그런가? 글세다.

어쨌든 이러한 타인의 취향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예술도 돈으로 계산된 셈법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이 작품이 조성할 수 있는 비자금의 규모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을 보고 형식적 유희에 만족하고 끝낼 수 밖에 없는 팝아트라는 예술사조가 있다. 이것도 타인의 취향인지라 누구는 앤디 워홀을 보며 눈물까지 흘린다고 하고 낸시 랭을 추종하며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복제한다니 역시 취향은 취향이다.

우리나라는 예술이나 정치나 가리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취향에 봉사하는 사회다.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이 삼성가에 들어 갔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오래 걸어 두고 한사람의 취향에 봉사하기에는 좀 지루한 그림 같은데 무려 90억인가? 일찍히 프랑스에 있는 스키장 슬로프를 통채로 임대해서 스키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취향 한번 거대하다. 이쯤되면 짐짓 진지한 척하는 자세는 봐줄만하다. 어쨌든 타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이런 타인의 취향도 방치해야 하나?

2007/12/07 18:10 2007/12/07 18:10
DrunkenSTAR 이 작성.

위작은 복제와 달라서 엄연히 예술은 아닌 것이지요. 글세요,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사회에서 위작은 카피의 의미로서 효율적인 배포를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카피라는 기계적 기능이 아닌 위작과 같은 예술과 기술의 오묘한 위치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적 감흥을 배포 내지는 전이 하려는, 아주 좋게 봐줘서 이 훌륭한 예술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 한 순수한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여기까지는 사회적 합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원본과 사본, 즉 위작의 판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입니다. 이를테면 예술적 사조에 걸맞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여 밖이 안이고 안이 밖인 원본이 없는 세계, 바로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 과연 원본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날의 위작은 위작 자체의 논란을 비켜갑니다. 위작 자체에 대한 검증은 차라리 순진합니다. 예를 들어, 사본인줄 모르고 또 사본을 배껴서 나온 것은 사본의 사본인지, 비록 사본이지만 사본 자체가 사본의 사본에게는 원본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지 아닌지 판별도 안되기 때문 입니다. 즉, 어렵사리 사본이라 또는 위작이라 판별해도 그것이 원본의 위작인지 위작의 위작인지 알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기계적 사본과 달리 위작은 예술의 경계와 아주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작은 사본처럼 널리 공유하는 기계적 기능만을 함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윤리적이며 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예술적 윤리는 일단 버려야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윤리는 합목적적이진 않겠습니다. 일단 위작이 만들어지면 위작을 간직하고 혼자 감상하며 나름대로 감흥을 받는 것이 아닐테죠, 그렇다면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일단 위작은 논란을 비켜서 목적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유통 과정을 거칩니다. 상업적인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상업적인 유통을 거쳐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 내는 과정, 즉 위작의 세탁 과정을 거치게 되있습니다. 이때, 이 믿음에 가장 훌륭한 조력자는 위작의 배포자 뿐만 아니라 원본에 비과학적인 신념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원작자의 가족이거나 원작자를 대표, 대변할 수 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측근이라면 이 조력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박수근과 이중섭선생의 위작 논란이 있던 작년 가을께, 제주도에 남아 있는 이중섭선생의 셋방에는 여전히 서귀포 섶섬, 그 너머 가족이 살고 있는 일본을 바라보는 이중섭선생의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섭선생의 평생 꿈은 가족과 함께 소박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는지요? 이중섭 미술관에 가보면 이 애틋함으로 절절한 편지로 인해 사뭇 그리움과 소의 깊은 눈망울이 닮아 있다는 것을요.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습니다. 방목하여 생긴 그 이쁨과 이중섭선생의 삶은 아주 달랐지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으로 당하고 결국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중섭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그저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정도. 대신에 위작논란, 경매장에서 수억원에 거래 쯤이 오늘날 우리가 만든 이중섭선생의 스탠스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 검찰은 이중섭선생 뿐만 아니라 박수근선생의 작품 2천8백여점이 모두 위작이라고 판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 위작을 배포한 정황이 있는 김용수씨와 조력자로서 공모한 정황이 있는 이중섭선생의 아들 이태성씨가 끼어 있습니다. 박수근선생과 이중섭선생이 서양미술사의 폴고갱이나 반고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국미술의 패트런이라 할 수 있는 김용수씨, 이중섭선생에 관한한 그 누구보다 애정 어린 사무침을 가져야 했을 아들 이태성씨가 "호당 얼마"의 서글픈 상업주의에 복무한 결과입니다. 예술? 이것도 이젠 가격 입니다. 세계적으로 가격이 비싼 작품을 내걸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야 말로 문화적 유희인양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태도가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위작 입니다.
2007/10/23 10:12 2007/10/23 10:12
DrunkenSTAR 이 작성.

영화, ONCE

2007/09/29 22:51 / 관심
더러 음악이 좋은 영화가 있다. 일전에 스윙걸스가 그랬고 영화 'ONCE' 가 그 축에 든다. 영화 'ONCE" 는 납득할만한 감동이나 클라이막스도 없는 소박한 인디 영화다. 게다가 영화는 액스트라도 없어서 카메라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호기심과 더블린의 거친 풍경이 그대로 비춰진다. 한국의 서울이나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나, 세상 도처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생활에는 도무지 치장이란 있을 수 없다. 그저 그런 진부한 생활과 한번쯤 있을 법한 소박한 이야기에 한 10년쯤 장농에 처박아 둔 체크무늬 셔츠 같은 포크 음악이 단조로움을 더욱 단조롭게 만든다. 음악다방에서 인생의 어느 성긴 자락을 물끄러미 음유하는 듯 편안해질 때 쯤이면, 저절로 특별한 순간만을 원하는 삭막한 우리의 일상이 먹먹해진다. 몹시 소박해서 너무 아름답고 근사한 영화, ONCE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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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22:51 2007/09/29 22:51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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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본인의 그림에 상징이 없고, 어떠한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다고 말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뜨의 그림 앞에 서면 정작 '무슨 의미일까'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실을 창조하는 데는 과거의 일에 철저히 관심을 끊는 방법이 있다. 보이는 것을 믿고(믿는다고 생각하고), 현실의 실제적 사물을 자각하는 것은 과거의 현상을 미메시스 하는 행위일 뿐 창조의 행위는 아니다. 눈에 대한 적응력이 진리 보다 우위에 있는 현실주의적인 우리들은, 과거를 모방한 현재의 믿음에 해석을 달리하거나 새로운 언어로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사물이 주는 교훈에 충실하기만 해도 상식적인 사람으로 오늘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사물을 고전적으로 이해하고 언어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성이나 초전도적인 유행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일단 믿어 보고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는 믿음과 합리화의 황홀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러한 부류의 관심은 전통에 있기 때문에 미적 관심 보다는 예측 될 수 있는 의미 관심에 더 민감하다. 앞과 뒤가 없고, 안과 밖도 없는데다가 심지어는 새와 잎이 한몸인 마그리뜨의 그림에서 전통의 반응은 대체로 희안함이거나 괴리일 것이다. 애써 아는체를 해보아도 작품과 나 사이에 좀처럼 괴리감이 가까워지지 않을 때 현실과 소외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현실주의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일까? 마그리뜨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며 칼리그램을 한다. 온통 이치에 맞지 않고 직관되지 않는 현실속에 존재하면서도 그런 존재자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한계를 구원하기 위해 마그리뜨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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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 1926
캔버스에 유채
139.5 x 105.5cm
어떤 머리틀을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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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1964-65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더비 해트도 아니고 파이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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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추구, 1963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죽은 물고기는 생선이다.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위에 진실이 묶여 있고 진실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죽은 것을 살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은 재현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죽은 것을 통해 현실을 보게 되면 그때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만 믿어도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일차원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현되기가 실로 어렵다. 노빠의 좌파신자유주의의 낯설게 하기가 그랬고, 황빠의 말씀만으로 존재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그랬다. 보이는 것 자체가 저열한 분열을 일삼았고 광기만을 지닌 텍스트들이 난무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량, 감당하기 힘든 패러독스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치 말아야 할 세계가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우상안에 갇히기를 원한다. 편안한 세상, 안락한 금가르기의 현실에 필요한 건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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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바다, 1951
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그럼, 여긴 바다속??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공화국 정부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피카소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편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이나 큐비즘이 부르주아지적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에서 비롯 됐다는 점에서 대게의 큐비즘 작가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예술적 영감에 의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독재에 저항하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파괴를 창조의 미덕으로 삼고 평화를 권력의 반동으로 연관지었던 시대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양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결집을 만들어 냈으며 정치적 준거로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열정이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을 망치거나 분열시키고 가족들 마저 그를 경멸하는 것을 읽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점령한 열정적 젊음과 좌파 지향을 한없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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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349.3cm * 77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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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2007/04/15 04:02 2007/04/15 04:02
DrunkenSTAR 이 작성.

드림걸즈

2007/03/01 03:01 / 관심

솜씨 좋은 노래만으로 드림걸즈의 천박한 상업주의와 성급하게 봉합해버리는 화해 무드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랑루즈 이후에 OST 욕심이 생겼다는 점과 트럼펫이야 말로 있을지도 모를 내 음악적 감수성이나 비주얼한 장치면에서 그나마 그럴싸하게 들어 맞는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거들먹거리는 가족이란 테마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실, 가족이란 관계는 형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안에서 혈연이나 가족간의 사랑 따위의 내용은 차라리 탄압에 가깝다. 가족이란 관계는 모두가 그럴 것이란 고리타분한 정의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적 형식이고 그 형식안에서 개인의 상실을 강제한다는 염연한 현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볼모로 사회적 관계마저 가족의 테마로 묶으려는 시도는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상업적 필요에 의한, 다루기 쉬운 조직속의 개인으로 존재를 약화시키려는 악랄함을 목격하게 한다. 드림걸즈의 커티스의 역할이 대변하듯 이러한 악랄함을 자행하는 남성이라는 집단이 오랜 세월동안 마치 성적 자부심인냥 취급해왔던 가부장의 의미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결탁해왔다.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한 가장의 측은함을 위로하기 전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부심을 부여 잡고 온갖 타협들과 타협했던 패배주의를 질책 받아야 옳다. 드림걸즈의 멋드러진 흑인 음악이 백인의 입맛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토대로 흑인들의 꿈을 마치 백인 우월 사회와의 진출인양, 또는 흑인 음악의 저항성을 들먹이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실, 드림걸즈에서 음악을 빼고, 카리스마가 가신 비욘세의 아름다움을 빼면 차, 포 땐 장기판처럼 긴장감이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공한 나쁜놈인 커티스를 통해 가족과 상업주의가 긴밀히 협작하는 문제적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걸즈가 드림을 실현하는 영화적 시나리오를 벗어나 커티스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당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살살 달래 주면 언제든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회란 참으로 천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 돈의 양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드림걸즈의 메세지 되겠다.

2007/03/01 03:01 2007/03/01 03:01
DrunkenSTAR 이 작성.

하얀거탑

2007/01/15 23:20 / 관심

드라마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게가 지루한 일상사에 마치 찬란하게 빛나는 스릴과 일탈을 대리만족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각자 경험했던 현실의 일탈을 대비시키는 재미가 솔찮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라마의 구조가 출생의 비밀, 삼각구도, 근친상간과 같은 소재를 비켜가지 못하고 나름 세속 친화력을 과시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티비 드라마를 교양머리 없는 군상들의 수다 쯤으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에게 하얀거탑은 그야말로 거탑이 아니라 적당한 눈높이를 제공한다. 인생에 그 따위 세속적 구도는 정말 수다일 뿐이고, 시종일관 진지하고 야망을 향하는 인간들의 권모술수가 비단 정치권이나 높은 계급의 전유물이 아님을 신중하게 읆조린다. 물론, 해방이후 우리 사회에서 의사란 계급이 하찮게 취급 받아온 적은 없지만... 적어도 계급간의 갈등이 아닌 계급 내의 정치적 술수가 어떤 거대한 이념적 의미를 가지지 않고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티비 드라마가 얘기한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만 하다. 정치도 세속의 일이다, 다만 정치적이란 의미가 정치를 한다는 어느 한 계급에 국한되어 회자되었고 게다가 정치계급을 대체로 참 나쁜 계급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에서 일상적이고 일반화된 정치적인 관계를 티비 드라마가 정치적으로 풀어 내어 진지한 재미를 준다는 것이 나름 상쾌하다. 적어도 이런 상쾌함은 김명민이나 김창완의 출중한 연기만으로 아우라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다.

2007/01/15 23:20 2007/01/15 23:20
DrunkenSTAR 이 작성.

호텔 르완다

2006/09/21 03:06 / 관심

호텔 르완다를 그저 감동적인 영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영화 홍보용 홈페이지의 타이틀인 기적과도 같은 용기가 시작되는 곳이란 진부한 마케팅적 텍스트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루세사바기니의 용기가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래서 아름답다던지, 아프리카의 쉰들러 리스트 라는 댓글평은 차라리 영화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영화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내전으로 서로를 잔혹하게 학살하는 1994년의 상황과 그 와중에 살아야만 했던 르완다의 민중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바퀴벌레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그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감동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폴 루세사바기니의 행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남기고 죽음으로 부터 떠나야만 하는 서구 외국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종족 갈등은 왜 일어 났으며, 서구 사회(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외국인들이 아닌 멀리서 지켜보고 결정하는 사회)는 왜 이들이 벌이는 대학살을 방관해야 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종족 갈등은 1919년 벨기에가 르완드를 식민지배하면서 생겨났다. 벨기에는 편리한 지배를 위해 종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인사정책을 시행한다. 다수인 후투족을 배격하고 소수인 투치족에게만 낮은 관직을 주며 두 종족간의 우열을 갈라 놓는다. 그로부터 두 종족간에 끊임없는 분쟁이 발생한다.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식민통치이념은 생존을 위협하고 결국 인종청소인 제노사이드가 일어 나는 상황이 되자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한다. 세계 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은 왜 방관 했을까? 1992년 소말리아에는 3만의 미군을 투입하여 중재를 했던 사례가 르완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이유가 소말리아에는 4개의 미국 유전 업체가 원유를 채굴하고 있었고 르완다에는 아무런 정치 경제적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25만의 투치족이 후투족 시민군에 의해 학살되는 동안 폴 루세사바기니는 1200여명의 투치, 후투족 난민을 그의 호텔에서 지켜낸다.

서구사회의 인도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작동하는 이념이다. 비단 르완다의 경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호텔 르완다는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서구사회의 모순과 작동원리를 지상의 둘도 없는 이상인양 추구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부조리한 일들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다. 희망을 만들었던 콘스탄트 가드너와 달리 호텔 르완다는 분노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보여주며 불편하게 만들고 알아가게 만든다. 영화는 묻는다. 불편해라, 저 사람들을 보라, 불편한 그대들이 방치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방치가 공공연하게 늘어가고 있다. 평택 사람들이 그렇고, 매향리 사람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이념에 내몰리는 모든 민중들이 그렇다. 계속 불편해 하기에는 우리의 피가 너무 빨갛고 너무 뜨겁다.

2006/09/21 03:06 2006/09/21 03:06
DrunkenSTAR 이 작성.

이중섭의 방

2006/09/08 04:31 / 관심
제주도 서귀포에는 이중섭 화가가 세들어 산 방이 있다. 마당 앞으로는 섶섬이 보인다. 섶섬은 천연기념물 18호다. 이중섭 작품의 위작 논란은 위력적이다. 이중섭 미술관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눈을 부비는 관람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나 또한 그따위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셋방을 나서자 마자 보이는 섶섬을 이중섭이 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름다운 풍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섶섬 넘어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일본쪽 방향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중섭이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을 그렸던 때는 그의 가족들이 일본 송환선을 타기 전이다. 그가 그린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에서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리움을 예견했을리는 없겠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편지를 읽으며 그 그림속에 그리움은 어렵지 않게 묻어 난다. 그의 방앞에 서 보았다. 섶섬이 보이고, 물론 지금은 각종 현대식 건물과 전기줄이 시야를 좁히지만, 그도 이 자리에서 저 섬을 보았겠지...

제주도에는 말만큼이나 소도 많다.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다. 방목하는 자유가 소도 말도 이쁘게 한다. 유목하는 사람들이 가장 태초의 웃음이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동물도 그렇다. 다만, 이중섭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들에게 당하고 친구들에게 모함 받은, 정에 굶고 사무침에 서러운 사연 많은 표정이다. 오늘날에도 그는 대접 받거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 한국 미술의 두 거장(이중섭과 박수근)이라며 호들갑스럽기만 하다. 전쟁 후, 그리고 오늘 미술을 대하는 패트런들의 관심은 여전히 호당 얼마로 측정 가능한 미술에 열중한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현대 한국미술의 역사적 획이었다면, 서양 미술의 폴 고갱과 반 고흐 만큼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다못해 대중 미술 서적에서 조차 이 두 예술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중문 단지에서 벗어나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셋방 앞에 서서 섶섬을 바라보길 권한다. 50년전 이중섭이 바라보던 그 시야로 말이다. 안타까운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2006/09/08 04:31 2006/09/08 04:31
DrunkenSTAR 이 작성.

천하장사 마돈나

2006/08/23 18:22 / 관심

우리에게 장사에 대한 기억은 유서가 깊다. 첫걸음에서 필수적으로 실패의 과정을 경험하는 엎어짐으로 부터 단지 좀 덜 아파서 울지 않은 아이에게 부쳐지는 장사 타이틀,  장사해서 최대?의 개그맨이 된 강호동과 장사하다가 역시 최대의 파이터가 된 최홍만까지, 그리고 오물조물 천하장사 쏘세지.
하지만, 지금까지 장사들이 보여준 장사아치의 정신에서 멀찌감치 달아난, 정말 기대 최고조인 장사가 온다. 천하장사 마돈나. 이 시대에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2006/08/23 18:22 2006/08/23 18:22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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