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일까? 어제 타는 듯한 울화는 미디어법 자체가 아니라 꼴보기도 싫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를 시정잡배의 포스로 죽치고 점거하여 절차, 민주적 합의, 하물며 인격 따위까지 개무시하며 법안을 통과시킨 뒤 환호하는 모습에 온갖 역겨움이 목구멍을 태워버린 것이다. 미디어법이 통과 되도 쌍용차 공장에선 사람들이 다쳐 나가고 어떤 아내는 오늘 갖 돌박이 아이, 남편과 영영 이별을 고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하다. 뱃속에서만 어제 쳐 마신 술과 분노와 역함이 뒤섞여 요동을 치고 있다. 미디어법은 당장의 민생 법안도 아니요 앞으로도 방송사 근처를 다니는 택시나 식당, 극소수의 방송 종사자의 밥그릇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거짓말은 이미 들통난 상태다. 게다가 제 아무리 조중동이 방송사 지분을 30%씩 사들이고 몇년 후에는 스스로 방송사를 차린다 한들 안보면 그만, 그들의 혹세무민, 날조 방송의 행간에 비웃음을 날릴 만한 성숙한 정치, 현실 인식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언제나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렇게 폭력의 비호를 통해 태어 났었다. 하지만 위기의 과정과 순간에도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는 정부나 국회에 있지 않았다. 학생, 시민들이 학습하고 의식하며 끝내 거리에서 만들어 냈다. 민간 정부가 들어 서며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그런 제도 안에서 실현, 지속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국회에 날치기며 폭력을 위시한 법안 통과의 절차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미디어법은 어떤가. 그 과정의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이전의 분노와 다른가? 미디어법을, 한나라당의 반역적 행위를 역사가 심판해줄 것이라 믿고 기다리면 될까? 한가로운 생각이다. 성숙한 정치 인식, 더욱 나이브한 생각이다. 미디어법은 역사를 바꿔 놓을 법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국가와 전체적 추구,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대한 무저항, 가난의 성숙, 반민족 반민중적 인식의 확산, 각종 천박함의 다양성을 서서히 침투시키는 제도적 장치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정권 유지를 열망하는 한나라당, 기득권의 만세를 원하는 조중동의 법이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한번 인식된 관점을 도무지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강제법이다. 이로 인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더 많은 부조리를 저변에 천작시킬 제도다. 그때의 역사란 일그러진 역사다. 그때의 역사는 한나라당과 조중동과 이명박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경쟁에 도태된 자, 게으른 자로 격하게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심판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 지금 당장 미디어법이 우리에게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역사로 갈 것인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2009/07/23 18:23 2009/07/23 18:23
DrunkenSTAR 이 작성.

평가와 열정에 관하여

2009/07/16 18:48 /

회사에서는 누군가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회사는 그것을 정중하게 '평가' 라고 한다. 평가는 곧잘 이런 식으로 부연된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되지 않는다.", 또는 "측정하지 않으면 행해지지도 고쳐지지도 않는다."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드러커와 세계적인 전력기기 회사인 ABB 의 퍼시 바네빅 회장의 말을 엄숙하게 빌려 말한다. 이것을 국내 기업에서는 KPI 라는 툴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직급, 팀 단위별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사안별, 기간별로 달성 여부를 모니터링 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애면글면 어떻게든 사용하려는 입장인데 중소기업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다. 관리자도 실무자고 경영진이 영업직인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처럼 간지 좀 세우겠다고 KPI 같은 평가툴을 도입했다가는 한해 농사 평가도 못해보고 말아 먹기 쉽상이다. 어줍잖이 지식산업 좀 한다는 기업에 있어서는 측정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있냐는 둥 에둘러 검토조차 복잡하다는 입장이다. 이렇다 보니 정성적 판단이 각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대한? 잣대가 된다.

여의도에만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성적 판단이 더 많은 중소기업에도 만만치 않은 정치가 있다. 줄을 선다는 개념 보다는 평가할 시기가 오면 관리자들은 1년간 가장 인상 깊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것이 프로젝트 일 수도 있고 술자리의 난장일 수도 있으며 클라이언트의 지나가는 말 일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피평가자는 내내 관리자의 추억에 남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의 불경기, 이직 시장도 좋지 않은 때에는 정치? 행보가 다소 디테일해지고 관리자들도 다른 관리자들과 이런 저런 평판을 들으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이렇게 한바퀴 돌게 되면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응당 편가르기가 시작된다. 왜 저놈은 내가 이뻐하는 애를 싫어하지, 어? 내가 미워하는 앤데 임원이 좋아하네, 따위의 각종 정서를 짜집기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고 거기에 점수를 기입한다. 물론, 각 항목마다 가중치가 다른데 이 가중치의 근거는 직관이다. 정서와 직관이 합쳐져서 평가 라는 엄숙한 말로 승화된다.

누가봐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기업의 오래된 관습인 비인간적인 시스템도 적용되지 않은 거짓말 투성이로 개인이 평가된다. 이 평가를 통해 당장은 관계가 좋아진다. 좋아 하는 기준으로 좋아 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가 되었으니 궁합도 잘 맞는다. 이것을 또 엄숙하게도 '시너지' 라 명명하면 할말이 없어진다. 관리자와 보기 좋은 관계를 맺어 두지 못한 이른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뻔하디 뻔한 길을 걷게 된다. 인사라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일하겠다는 의지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이런 경외로움이 지속적으로 조직에 투여 되면 자신을 스스로 리드 하고 소신에 관계된 자유로운 열정을 가진 개인은 차츰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일단 조직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하면 금화에서 구리를 빼고 다시 재련하는 매카니즘만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묘하게도 회사에서 정성적 평가에 의존하여 조직을 관리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평가를 시스템적이고 디테일하게 할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평가가 시스템적일수록, 또는 정치가 난무하는 평가일수록 리더만 득실대는 조직이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회사나 조직은 걸핏하면 리더쉽을 얘기하지만 리더쉽이 득달거리는 조직은 전진하지 못한다.

회사는 개인에게 스스로 열정을 갖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제는 대기업에서 수많은 사람을 관리 라는 학문적 기능으로 묶기 위해 신입사원연수, 선배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이해, 시스템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운용 의 과정을 거쳐 리더쉽과 시너지와 평가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조직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영혼의 노숙자' 가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지식산업 좀 한다는 벤쳐, 중소기업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을 극구 도입하길 원하는데 개인을 이성적인 인간으로, 열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수완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것이 벤쳐나 중소기업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퇴직금이나 마찬가지다. 리더쉽이나 마케팅 전문 강사의 강의를 쫒도록 하지 않고 인문학 선생님, 철학, 실물경제가 아닌 거시경제학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제공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래도 평가가 필요 하다면 예술사조 강의를 듣고 다음날 디자이너를 몽땅 미술관에 데려가 작품에 대해 토의하고 그때의 태도와 자세를 토대로 평가를 하는 방법은 왜 벤쳐, 중소기업에서 해선 안되는 터부처럼 얘기되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2009/07/16 18:48 2009/07/16 18:48
DrunkenSTAR 이 작성.

언제 일이던가? 작년 2월? 그들의 수상한 행보가 결국 이명박과 정책 연대라는 레토릭으로 포장되던 때가. 정체성과 노동을 반동했던 당시 위원장이나 찬성표를 던졌던 노동자이며 동시에 자본가들이 더 보태어 권력의 강아지임를 선언했던 때가. 지금 그들이 '열받고, 토사구팽 당했다' 한다. 그들 스스로 쟁취하길 원했던, 그러한 정치적 수사 쯤이면 쟁취할 것 만 같았던 '대박' 의 꿈이 사라졌다며 그야 말로 징징거리며 이제서야 분쇄를 운운한다. '황석영의 스팸'이다. 이것은 한국노총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의 열받음으로 해로움이 희석될리 없다. 게다가 배신감을 한나라당 앞에서 외친다. 딸랑딸랑 봐달라는 얘기다. 다른 노동자들과 공동체에 머리를 조아리고 반성을 해도 모자를 판에 열받음을 핑계로 방구질이다. 세상이 지나가던 강아지 새끼도 '이 놈이 정규개새끼인지 비정규개새끼인지' 따지는 어수선한 판국이다. 그마저 그거 아니면 살 길 없는 그들 살리 겠다고 다수당에 안되는 쪽수로 협박하고 통하지도 않는 윽박을 질러대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서도 기껏 딸랑거린다는 것이 '성과급을 삭감해 정규직 임금마저 깎아버리자'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해로워도 이렇게 해로운 덩어리가 없다.

http://www.vop.co.kr/A00000259421.html


우리는 무엇인가?
이용득의 해로움
2009/07/09 20:20 2009/07/09 20:20
DrunkenSTAR 이 작성.

인용, 8월테제

2009/07/07 21:00 / 생각

"박헌영은 1945년 8월20일, 지하에서 활동해온 콤그룹의 잠정적 정치 노선을 정리하고 일제의 패망 후 세계의 정세와 해방정국에 있어서 좌익 세력의 노선을 정리하여 8월테제를 발표한다.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보고 쏘련의 부상을 의미 있게 규정한다. 당시의 정세를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로 분석한 박헌영은 토지몰수, 무상분배를 통한 농민, 노동자의 결집으로 공산주의 혁명의 다음 단계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완수하자고 주장한다. 남한에서 여운형, 김구, 이승만, 박헌영 등이 서로의 헤게모니를 위해 제각자의 노선을 대중에게 역설하는 동안 미군정은 지배권력을 어떻게 이양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한다. 이에 반해 북한에 진주한 쏘련은 조선의 운명은 조선인의 손으로 라며 우호적인 수사를 동원하고 이에 김일성은 귀국 연설에서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라는 '국가건설' 의 과제적 희망을 인민들에게 전파시킨다. 그에 반해 당파적 건국준비위원회의 파탄을 목도할 수 밖에 없던 남한은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해방 후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표면상으로 쏘련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처럼 군정을 수립하지도 직접적인 정책 관여도 하지 않았지만 북한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고도의 정치기술을 발휘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남한보다 북한이 먼저 구체제 청산, 사회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박헌영의 8월테제에 없는 것은 '권력' 이다. 박헌영은 해방 후의 상황을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로 보았지만 부르주아지와 협력을 거부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영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대중의 전취, 인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반드시 권력을 잡아야 하는 욕구가 매우 절제되어 있다. 다만, 장안파에 대한 위기의식만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나 진보나 대의제민주주의 체제하의 정치적 정당의 목적에서 정권 장악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2009/07/07 21:00 2009/07/07 21:00
DrunkenSTAR 이 작성.

법치란?

2009/07/03 15:16 / 생각
법치는 "법에 의한 통치"란 단순한 단어풀이가 아니다. 현대국가의 국민은 국가에 모든 폭력을 위임했다. 이에 국가는 모든 폭력을 독점적으로 지배한다. 법치란, "그것을 행사하는 국가가 공권력이란 고유 권한을 집행할 때 엄격한 법규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권력 행사 시에는 모든 국민의 자유, 헌법적 가치,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한 완전한 제도적 규범적 테두리를 절대 벗어 나선 안된다. 우리가 시위를 하다가 폭력을 행사하면 공권력이 그러하지 못하도록 공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집회, 시위 자체를 막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태는 무엇인가?

오늘날 한반도 남쪽의 인민들에게 가학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공권력은 과연 현대국가의 그것이라 볼 수 있을까? 폭력을 위임하고 폭력을 행사할 뜻이 없는 시민들이 어떻게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지 그 답은 시민에게서가 아니라 공권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이 사적 집단과 영합하여 시민의 생존과 권리를 불태워 버리는 끔찍한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것은 법치의 테두리를 명백히 벗어난 무수한 사례 중 대표적인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공권력은 이미 2009년 1월22일 용산에서 법치이란 이름을 잃어 버렸다.

http://drunkenstar.tumblr.com/post/134617071/ssangyong


[추가]
이른바 지게차 공격이 사측이 아니라 노조측의 공격이란 인용이 있다.
2009/07/03 15:16 2009/07/03 15:16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