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대 165, 민주노동당 한 지역구의 국회의원 경선 후보 선거 결과다. 13% 대의 정당 지지율을 얻고 있으면서도 겨우 3% 지지로 마감한 민노당의 이번 대선 결과 만큼이나 신묘한 숫자다. 초등학교 반장 투표에서도 저런 숫자는 무승부, 재투표를 의미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재선거를 하지 않고 '규정에 의거하여' 당원 번호가 빠른 후보를 당선시켰다. 그나마 빠른 민주주의 의사결정 체제 중 그나마 빠르다는 쪽수제도의 동률 처리 방안을 겨루기판의 체중 달기로 마무리한 셈이다. 아무도 군소리 하지 않고 재선거를 해도 무당 칼에 쩍 갈라진 숫자에 혀를 내두를 참인데 당원 번호 순이라는 규정집을 꺼낸다. 민주노동당은 그만큼 관료적인데다가 한나라당도 하는 일을 민주노동당도 똑같이 하고 당규정을 내세워 간단히 제압하려 한다는 점이 놀랍다.

종북주의란 무엇일까? 즉 북한과 정서적 교류를 너무 심하게 해서 명백히 비판 받아야 할 북한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이 종북주의 때문이란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어떤 행동이란 핵실험 같은 것을 말한다. 민노당 내에서의 패권주의란 무엇일까? 다수파인 자주파는 이번에도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내었다. 당의 헤게모니는 오래전부터 자주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이러한 패권적 경향을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민노당의 대선패배에 대한 논란의 핵심이고 쇄신의 방향에 큰 담론의 틀이다. 민노당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당원의 입장에서 이렇게 민중과 철저히 괴리된 담론의 틀로 사회주의경제체제의 구현이나 이를 위한 집권을 이룰 수 있을 지, 어둡기만 하다.

지독한 일이다. 민중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해도 권영길을 더 이상 민노당의 얼굴로 보지 않는데다가 극단적으로 민노당은 지지하면서도 권영길은 지지 하지 않는 올드패션의 진부함을 논하는데도 당은 해석 불가능한 언어로만 정치를 하려고만 한다. 이미지 정치를 비난할 줄만 알았지 정작 이미지와 정갈한 구호로 마음을 쓸어 담는 민중들의 쓸어 담지는 못했다. 결국 패션화를 경멸만 하다가 문국현에게도 뒤진 지지율에 당도하고도 내부 헤게모니적 노선 투쟁에 의례 클래식컬한 언어를 동원하여 그것들을 유희하는데 시간가는 줄 모른다. 최소한 세상을 바꿀 구호 정도는 회자 되어야 진보 정당의 진보화가 계몽되었을 터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뀔 수 없다는 원초적 진보에 대해 먼저 알아 버린 것은 민노당이 아니라 민중이었고 이를 반성하는 쇄신의 틀이 이른바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기댄 정파의 혁신이라는 것이 민노당의 생각인 것 같다.

최근에 이와 같은 '견 풀뜯어 먹는 반성의 소리' 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민중은 사람을 바꿔 정치와 세상을 바꾸겠다며 삶을 송두리채 시장에 내 놓으라는 이명박을 찍는데 스스럼이 없는데 자주가 먼저인지, 평등이 먼저인지 논의 한다는게 견 풀뜯는 소리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물며 자주며 평등을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못대고 치더라도 자주와 평등이 풀뜯는 소리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로 나와야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이제와서 종북주의와 당내 패권주의가 반성의 틀에 견주어지는 마술적 자세와 언어 도단은 민중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급기야 분당을 거론, 아니 견 풀뜯는 소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며 대놓고 깨지자는 분위기다. 차라리 반성을 못할 부류들이라면 깨지고 깨지는 것이 맞겠다. 한나라당이나 통합신당이 하는 구차스러운 협작 뿐만 아니라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와 조직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치졸성을 들어낸 마당에 다시 민중을 얘기하고 진보를 선전할 총선의 상황이 벌써부터 쪽팔려 온다. 도대체 민중을 걱정하던 당이 맞던가.

165대 165, 그리고 당원 번호 순이라는 이 당췌 당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자세가 안되어 있는 당의 규정일랑 한나라당에 헌납하길 바란다. 자주파는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연구하며 당과 당내의 정치를 위한 당을 만들어 북풍에 기대어 선거를 치루던 구호를 선전하던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 민중적 언어와 계몽에 힘쓰지 않고 자신들의 민주화 투쟁 경력과 지식을 기득권 삼아 '잘난체 하는 인사'는 현재의 민주노동당에 남겨 두길 바란다. 오래도록 민주주의를 연구하도록.

이 감동 없는 한해를 마감하며, 내년엔 민주노동당을 넘는 민주노동당을 기대한다.

2007/12/31 23:07 2007/12/3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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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계몽, 조직

2007/12/28 18:02 / 생각

정책을 보고 선거에 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가 이미지로 가벼워지는 현상을 개탄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이명박은 정말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의 대게는 이명박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싫어서가 해답이다. 이를 통해 대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짐짓 이러한 장미빛 미래의 담보가 이미지와 반정부 정서에 의해 형성된 마당에 정책이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이명박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진보의 이데올로기 찬탈을 그야말로 끈기 있기 주입했던 보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진단하는 상황이다. 당선 됐으니 정책을 재검증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개이치 않는다. 어차피 이제와서 정책을 살펴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인데다가 민주주의의 작동은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작동이라 생각하기 시작한 민중들의 집단적 행동에 토를 달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열심히 논의 했던 것이지만, 중요한 건 계몽, 그리고 계몽을 주도할 언어, 언어를 공유할 조직인 셈이다. 하지만 계몽도 언어도 조직도 모두 어려운 하수상한 시절이다. 진보라는 개념은 거의 비틀어졌다.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비정규직이 되어 88만원세대의 반열에 들어 있어도 제도적 거부를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이 사회에서 낙오됐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자괴와 더 열심히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긴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몽의 주제와 주체는 이 자괴와 긴장만으로 뭉친 덩어리를 해체하고 다시 재조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몽도 폭력이라며 나자빠질 드라마적 언어 비판을 일삼는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의 자기 중심적 패션은 더 이상 시대를 관통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대선 진단은 옳다. 하지만 언어의 개발을 위해 언어에 집중하는 이유가 계몽에 있지 않고서는 합목적적이지 않다. 게다가 운동적 방식도 불특정 계층과 동시대의 모든 대중에 있어서도 생산적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장미빛 미래에 좌절하고 아무것도 인정 받지 못하는 세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하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절한 세대에게 저항과 투쟁의 진보적 언어로는 세대를 조직할 수 없다. 이것은 좀 더 이미지적인 메시지여야 한다. 흔하고 어떤 대화에도 불현 듯 끼어 들어 유머가 되거나 상처가 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다. 실은 세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대를 분리시킨 지난 세대의 잘난척에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건 아주 간단하다. 운동해보지 않은 세대를 배제 시킨 잘난척이다. 이로 인해 세대는 다음 세대와의 교감을 중단했고 세대를 돌보지 않았다. 단절된 세대는 그만큼 좌절했고 사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셈이 되었다. 연대는 보증처럼 부정적 정서를 함유하게 되었고 나만 책임지고 나만 잘되면 되는 세대가 되었다. 서로 서로를 보듬어도 지난 세대가 만들어 놓은 단절적 사회구조를 연결하거나 뚫어 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세대는 각개로 움직인다. 누군가는 파산할 것이고 그 만큼의 잉여를 바라며 버틴다. 센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놈이 센 놈인 영화적 언어가 세대의 담론에 방점을 찍는다.

언어, 계몽, 조직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80년대 좌파적 언어다. 현실은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낭만적 개념이 저항과 투쟁을 대변해야 한다. 이를 만드는 일은 현재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현재 진보가 단절시킨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순서를 논하자면 조직이 먼저다. 사실, 언어는 기존 세력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에서 할 일이고 계몽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흘러야 한다. 이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라 해야할 문제가 남은 셈이다. 장미빛 희망인지 미래인지... 선거는 끝났다. 이제 조직이 그것을 만들 시간이다.

2007/12/28 18:02 2007/12/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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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2007/12/26 22:56 / 생각

상황 하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법과 제도라는 골리앗을 한사람의 힘으로 바꾼 한사람의 이야기다. 1인 시위도 하고 수많은 민원과 진정으로 법 조항을 바꿔냈다. 국가는 미쳐 살피지 못했다며 다윗에게 표창을 한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언젠가 처한 현실에 따라 바뀐 법을 대한다. 누가 이 법을 정략과 날치기에 끼워서 만들었을까.

상황 둘, 국회 앞에는 매일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들이다. 자기 잇속이나 챙기려고 저런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라고 한다, 일당 얼마라며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억울하며 저렇게 까지 할까 라며 안타까워 하기도 하지만 이내 관심을 거둔다. 검은 차가 들어 간다, 임기중에 지쳐 떨어질 것을 기대한다. 누가 이 사람들의 억울함을 만들었을까.

상황 셋, 서해에 기름이 유출됐다. 바다와 뻘에 기대 살던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휴가며 휴일을 반납한 시민들이 몰려 들어 기름으로 오염된 바다와 해변을 닦아 낸다. 한숨,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냐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냐며,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름을 닦아 내야 한다고도 한다. IMF 때 처럼 국민의 저력이내 힘이내 하며 언론은 치장질에 바쁘다. 기름에 피부병에 걸리고 벤젠에 폐가 망가져도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삼성도, 허베이호의 선주도, 보험사도, 하다못해 국가도 책임지지 않는다. 왜? 국가가 부르지 않았으니까. 방학인 아이들을 데리고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태안을 찾는 착한 아빠는 무엇을 가르쳐 줄까? "서로 도와야 한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냐.

시시비비가 있어야 감동적인 사회다.

2007/12/26 22:56 2007/12/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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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의 시대

2007/12/21 15:58 / 생각
선거 전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지나친 유아적 기대였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지지했으니 군말 말고 인정하라는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동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선거 끝난지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부터 사유하지 않는 군상들의 추함을 드러내며 결국 절반의 국민 뒤로 숨어 이명박 특검 거부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 통합을 천명하며 복수를 공공연히 발언하는 정신 분열적 사고를 선보이는 꼴이 우숩지도 않다. 인간의 퀄리티를 논할 수 없는 자에게 열광이라니. 게다가 온갖 위장과 천박을 선전하는 교양머리 없는 인간들과 왜 통합해야 하는가 말이다. 생리적으로 위선적인 자가 경제를 살리고 다른 모든 가치를 변질시키는 사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은 사회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며 짐짓 교양 따위를 얘기하며 투기를 옹호하는 마음의 소리에 충실한 자들이 득실대는 사회에서 살기를 권한다. 비정상? 누가 비정상이고 정상인가. 그 안에서 모두 같아 질텐데 말이다. 위장하지 못해 미안해 하며 농약을 마시고 그것을 측은해하며 위장에 전념하는 사회를 보게 될 것이다. 그안에서 모두 인플레이션으로 간단히 제압되는 근로소득을 부여 잡고 잘 살길 바란다.

젠장, 토했더니 위장이 쓰리다.
2007/12/21 15:58 2007/12/2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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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지지 2

2007/12/18 18:24 / 생각
권영길은 너무 아웃사이더라고 얘기한다. 민주노동당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얘기한다. 권영길에 투표하는 것은 사표라고 얘기한다.

극우세력과 신자유주의를 개혁이라고 호도하는 세력들이 주도하는 선거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을까. 자신들이 개혁 성향이라고 하는 사람도 뜯어 보면 짝퉁 진보를 개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노무현과 개혁세력이 만든 우와우의 세계. 정치담론은 궁색하기 마련이다. 민주노동당이 이상주의라고? 얼마나 민주주의적이지 않으면 좌와 우가 논쟁하는 사회를 그려내지 못하는 것일까.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표는 사표라고? 당신 영혼이 먼저 죽은 건 아닐까? 마치 자기는 개혁 성향인데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 사표가 될 것만 같은 군중증후군에 시달린다면 잘 생각해보라 군중속에서 당신은 당신인지? 당신은 군중일 뿐이다.

민주노동당 지지를 재확인 하며..
2007/12/18 18:24 2007/12/1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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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진을 찍었지만, 그만 두었다. 주말이면 삼청동 거리를 몰려 다니며 셔터를 눌러대고 장비와 기종의 비교에 열내는 무리에 섞인 듯한 불쾌한 기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불온한 사색을 하기에는 수양도 부족하고 불온치 않은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쁘띠부루주아 라서 그렇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약한 발상이긴 하지만 수용하는 대신 존경하기로 했다.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해서 누구나 활동가가 될 수 없듯이 최소한 점진적 진보를 위한 활동가들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그들이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사진가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난 사진가도 활동가라고 생각한다. 대게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는 제도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이라는 제도적 합의와 불법적이지 않는 절차적 합법에 의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조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부조리의 발견은 제도와 법이 정한 정상의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조리의 발견은 다분히 불온의 태도에서 비롯되어 사색의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본다. 불온한 시간을 깊이 겪어 오지 않은 나와 같은 쁘띠부루주아의 신체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불온한 태도와 발견의 도그마를 가진 사진가가 있다면 그가 찍는 사진은 이미지가 아니라 부조리를 배설하는 고발장이다. 사진은 아름답게 찍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와 피사체를 둘러싼 환경이 끊임 없이 내뿜는 역사의 시간을 찍는 것이다. 이런 요약을 해내려면 사진가는 어지간한 불온만으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피사체와 오래도록 관계하고 피사체를 둘러싼 환경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색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사진을 고발장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발견해내는 사진가가 있다. 이시우와 노순택이다. 두 사진가는 우리사회의 가장 거대한 부조리인 '분단' 을 고발한다. 분단이라는 피사체와 분단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환경을 온 신체를 통해 요약해 낸다.

우리는 왜 분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분단은 우리 사회의 가장 거대한 부조리이면서 동시에 다른 부조리에 생산하는 숙주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숙주가 전염시키는 부조리의 현상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살아 간다. 나는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의 연속성이 마음을 구속하고, 하다못해 자기 검열을 통한 표현의 단속이 합법적 절차인 것 처럼 현상적인 부조리의 고착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분단의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거대한 담론적 문제이며 역사와 민족적 문제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분단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단은 그동안 반공과 친미의 정치 상황에 의해 문제적 시각으로만 다뤄졌고 이에 접근하는 것이 차단되었다. 이 차단의 합법적 절차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이시우와 노순택은 이런 차단에 고발장을 내민다. 역사도 아파 본 사람이 아는 것이다. 분단을 피의한 고발장을 접수하여 아파 온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단은 피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시우 http://www.siwoo.pe.kr/
노순택 http://nohst.simspace.com/

2007/12/14 13:57 2007/12/14 13:57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아내와 종종 태어날 아기의 교육에 대해 논쟁 할 때가 있다. 우리의 논쟁 중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교육을 문제로 접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교육 그대로 지켜져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무너지고 교육 제도의 형식과 제도의 도입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교육 제도의 문제이면서 제도의 큰 축인 대학과 입시를 위해 학생을 둔 우리나라 대게의 가정이 견뎌야 하는 사교육비 문제가 바로 포커스이다.

아내와 나의 논쟁도 TV토론의 여러 대선 주자들처럼 포커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아내는 이명박을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이명박이나 현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게의 학부모와 같은 각론에 수긍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아내를 탓할 수는 없다. 아내의 생각은 이를테면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에서 만큼은 암묵적인 합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사교육비 많이 드는 몹쓸 세상이긴 하지만 좋은 대학, 덜 좋은 대학으로 나눠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대학은 서열화 되어 있고 공교육만 제대로 개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책적으로 얘기하면 입시 제도는 폐지하되 대학 경쟁력은 키워야 된다는 말과 같다.

입시 제도 폐지, 대학 평준화 하면 학부모들이 지레 겁을 먹나 보다. 아직 학부모도 아닌 아내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여기엔 몇가지 전통적인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입시 제도 없이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냐는 것과 공부 잘 할 것만 같은 내 아이를 위한 세계적인 대학의 막연한 필요성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적이며 일류인 대학 몇 개쯤 보유한 나라에 살고 싶은 약간의 애국심과 자긍심 따위도 양념되면 제도적 문제의 촛점인 사교육비에 있어서는 못난 부모 만나 미안해 로 덮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한 패러다임 안에서 학부모의 고민은 대게가 교육 제도에 학생들을 어떻게 적용하고 적응시키느냐는 문제를 교육의 문제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 주자들이 TV 에 나와 관념적 주장을 늘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책의 관점이 과연 교육을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제도를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따져봐야 할 역할은 오로지 정책 수용자에게 있다.

난 아직은 부모가 아니지만, 대게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남들처럼 제도에 적응하고 남보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확실히 이겨주길 바란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적응력을 12년동안 치루고 남들이 일류라고 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비로소 교육은 끝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학교가 없고 가르칠 어른이 없어 애초에 배움의 기회가 없다면 그보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 전문고, 자립형 사립고가 없다고 해서 희망이 없을까. 교육 제도에 더 잘 적응하는 아이를 자랑하기 위한 대학 서열과 학벌 중심적 사회를 지켜야 희망이 있는 사회일까. 나는 과연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예비 부모일까.

고백하건데, 이제 5개월된 아이가 다운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듣고 아내는 무척 놀랐다. 확률적인 것이라 괜찮다며 아내를 위로 했지만 그게 어디 생때같지 않은 아이의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소리인가. 애썼지만 과연 다운증후군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기를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내의 두려움은 얼마나 클까. 아이 앞에서는 나도 보편적 염려와 갈등을 하기 마련이고 애초에 아이를 앞세워 용기를 부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시간을 깨닫고 말았다. 생때같은 아이, 혹은 생때같지 않은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는 나름의 염려가 있다. 어떤 아이 건 간에, 아이를 가진 부모의 계급이나 정체성에 관계 없이 아이는 교육을 받을 제도적 권리가 있어야 한다. 부모의 염려는 그 권리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권리를 모두에게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협오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죽어라고 경쟁만 하면 될까. 부모는 아이를 교육 제도에 적응시키기 위해 죽어라고 벌어오면 될까. 바꾸면 안되는 것일까?

모든 아이의 출생이 축복인 것 처럼 아이들의 교육 또한 축복된 과정이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를 모두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아이의 이 특별한 시간을 축복되게 하기 보다는 견디라고 고문하고 견디지 못했으니 낙오자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있어도 어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해로운 교육 제도를 견뎌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해본적도 없지만, 나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바라며 교육을 시킬 생각도 없다. 내 아이를 특별한 학교에 보내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내고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가 특별한 교육 제도에 적응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을 낼 시간이라면 차라리 널려 있는 자연을 보고 느끼는 법, 산책하는 법, 친구들과 노는 법, 남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법, 반성하는 법 처럼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것을 도우는 보통의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이 나라의 알량한 대선 주자들과 자식들 염려와 걱정 뿐인 부모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가 무지개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내도 동의해 줄까.

2007/12/12 18:08 2007/12/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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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이미 반노동, 반민중적인 사고로 신자유주의 노선에 동참할 사람이었다. 일찍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노조 분할과 갈등을 통해 민주노총의 농촌마인드를 비난했던 한국노총이었다. 노사정 합의에 있어서도 사측과 정부의 안을 수용하고 민주노총을 이른바 따 시킨 것도 이용득 위원장의 정치적 발로 였다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가 이명박과 호기 좋게 손을 잡았다고 해서 놀라울 일도 아니다. 두 사람 다 정책이 관점을 바꾼다는 짧고 얄팍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들의 특징은 총론은 거창한데 각론은 형편 없는 열거를 주장하거나 총론을 목적하지 않는 각론을 늘어 놓고 선전하기 바쁜 부류들이다. 피지배자는 대게가 정책과 시스템을 통해 관점이 바뀐다. 하지만 지배자나 지도자는 관점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고 관점을 현실화 시킨다. 이명박과 이용득이 악랄한 이유는 지도자이면서 절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관점과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도자인척 한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전폭적으로 지지 하거나 최소한 지지할 곳이 없어 남들이 지지 한다며 안락한 비판적 지지의 대열에 서거나 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민중이 대다수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공포스러울만치 처절한 현실이다. 검찰이 BBK 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여론조사 1위 후보는 기소하지 못한다는 정치석 해석을 한 것 뿐이라며 신당은 결국 현직 검사의 탄핵소추를 감행했다. 어쨌던 검찰에는 일고의 믿음이나 인간적 측은함을 보낼 생각이 없다. 그들의 알량한 조직적 자부심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미친 해로움은 회복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5년에 한번씩 바뀌는 대통령이야 죽도록 해먹지 못하는 것이지만 검찰 조직의 해악은 작금의 차원을 넘어 선다. 이 해악의 요지가 현실을 파탄 낸 세력의 주둥아리로 부터 나왔다고 해도 여론조사 1위인 유력한 대선 후보를 기소할 수 없어 수사를 엉터리로 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검찰의 정치적 해석도 여론조사 1위인 후보에서 나왔고, 한국노총의 자기 계급의 정체성 부정도 관점의 존경어린 동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력 후보에 대한 반동적 줄서기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맥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은 총론은 같은데 각론이 다른 집단간에 낮은 단위로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어쨌든 현실이다. 온갖 비리와 도덕적 파탄을 동원해도 부동의 1위 후보를 만든 것도 민중이며 정체성 부정이 오늘날 참여정부의 가장 치졸한 실패라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급적 연대를 구축하여 스스로 일어서길 냉소하고 남의 부스러기를 주어 담는 거지근성에 복무하기로 한 것도 민중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실패한 민주노동당의 어려움은 반동적 민중과 진보라고 주장하는 반진보적 개혁세력으로 부터 잉태되었다. 주장하건데, 잃어 버린 10년은 잃어 버린 경제가 아니라 잃어 버린 진보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노무현, 정동영으로 이어지는 반진보세력은 개혁이란 비슷한 레토릭으로 현실 이반질을 해대며 2002년의 단일화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지근성과 비리에 내성된 민중을 만들어 낸 것도 10년간 반진보세력이면서 범진보인양 허튼 정치적 선전을 한 결과다. 10년간 부정된 진보로 인해 난치정체병에 시달린 민중들이 병에서 벗어나 안락함으로 복귀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다. 차라리 경제라도 살려라 떡부스러기라도 커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 중산층도 기대할 수 없는 노동자와 농민과 시장상인들이 이명박을 찍는 이 단순 명쾌한 이유를 밥벌이가 숭고한 대게의 사람들끼리 무턱대고 탓할 수 있나. 하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향한 이합집산에 정체성 따위는 없다고 해서 부자건 가난하건 보수건 진보건 간에 권력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각론에 매달릴 때, 사회가 더 좋아지려는 총론은 한낫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민중을 위한 총론을 얻을 수 없는 사회는 조금도 좋아지거나 진보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 타령만 하다가 사회적 시스템은 기득권의 관점과 논리로만 지배당할 것이 불 보듯 하다. 자기 호주머니 걱정만 하는데도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검찰이 1위 후보라서 기소하지 못한 이유와 한국노총이 1위 후보를 지지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고통도 우리가 받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물려 주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총론과 각론이 들어 맞지 않게 변명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두렵지 않은가? 이런 현실이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 공포인가?

2007/12/11 14:42 2007/12/11 14:42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어쨌든 타인의 취향이지만, 미술관 앞에서 디카질하고 그 유명한 전시회 갔다 왔다며 싸이에 사진을 등록하고 퍼가기를 기다리는 낚시꾼들조차 미술관의 미술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얘기할 줄 안다. 사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든 작품에 진지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모든 작품에 무슨 거대한 철학이나 작가의 실존적 무게가 세심하게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유명하기만 했지 잭슨폴락의 행위 페인팅이나 칸딘스키의 구도을 이해하는 부류가 많은 것도 아니다.

타인의 취향이지만, 목적은 간결하다. 레벨 있는 소비생활의 자랑이 우리 나라 미술관과 미술관에 걸린 고가의 작품들의 목적이다.(이것은 전부는 아니겠다. 연애의 목적도 있고..) 물론, 이러한 목적은 작가나 작품이 만든 건 아니다.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타인의 취향으로 방치된 대중들의 태도로 만들어진 우리만의 현상이다. 다른 OECD 국가도 그런가? 글세다.

어쨌든 이러한 타인의 취향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예술도 돈으로 계산된 셈법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이 작품이 조성할 수 있는 비자금의 규모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을 보고 형식적 유희에 만족하고 끝낼 수 밖에 없는 팝아트라는 예술사조가 있다. 이것도 타인의 취향인지라 누구는 앤디 워홀을 보며 눈물까지 흘린다고 하고 낸시 랭을 추종하며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복제한다니 역시 취향은 취향이다.

우리나라는 예술이나 정치나 가리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취향에 봉사하는 사회다.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이 삼성가에 들어 갔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오래 걸어 두고 한사람의 취향에 봉사하기에는 좀 지루한 그림 같은데 무려 90억인가? 일찍히 프랑스에 있는 스키장 슬로프를 통채로 임대해서 스키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취향 한번 거대하다. 이쯤되면 짐짓 진지한 척하는 자세는 봐줄만하다. 어쨌든 타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이런 타인의 취향도 방치해야 하나?

2007/12/07 18:10 2007/12/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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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노망 났다?

2007/12/05 18:08 / 생각

국민이 노망 났다 는 김근태의 반응은 단 한 순간도 정치적 판단을 버릴 수 없는 직업 정치인의 진정어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과 적당히 선을 둔 전력이 있었지만 그도 민중의 생존적, 정서적 환경을 파탄 내버린 정권의 중심이 아닐 수 없기에 명백한 오만이다. 오늘날 대선구도가 병리적으로 이상징후로 치달아 결국 노망이 될 수 밖에 없는 말기적 증상이 된 원인이 오로지 정권 교체의 열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한마디로 정치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기득권 수성에 나섰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후안무치 하지만 국민이 노망나지 않은 명제를 증명할 마땅한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BBK 의 안개가 걷히고 이명박 대세 구도가 고착되면 그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광명이 고작해야 한반도대운하와 300여개 사립고 라는 점이다. 국토를 찢어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를 통해 물류를 진작시킨 근대 국가가 없었고, 사립학교를 늘려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풍부한 상상력을 적용한 사례가 없는데도 그의 지지도는 절대 물러섬이 없다. 국민을 통채로 치매환자로 규정한 고약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망조의 관점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김근태의 노망은 정동영이 안찍고 어떻게 저런 위선적 인간을 지지할 수가 있냐는 통탄이다. 하지만 한스러움 수준에 머문다. 모두에 말했듯 그도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정권의 반민중적 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대운하와 교육정책의 방죽을 넘는 정권 교체의 열망이란 것이 노망적 지지도로 환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어두운 전망은 이러한 고착구도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 또한 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정권 교체의 열망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역부족에서 찾고 있고 벌써 부터 이를 반성해야 한다며 이론의 숙지 자세로 접어 드는 채비를 서두른다. 분열적 좌파가 아니라 텍스트적 좌파의 위험도가 증대되어 그나마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운동적 투쟁마저 거둬들이는 어둠은 아닐런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민중 계몽은 분명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근태식 반응으로 국민이 노망난 이유는 오래도록 한국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시행착오의 경험과 손쉬운 용서에서 비롯된 무식한 교양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근태가 말하지만 않았다면 이 사회와 국민은 확실히 병리적 이상징후에 빠진 집단 정신병동 맞다. 정신병동은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인간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맞닥들인다. 오늘날 대선구도는 이러한 실존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모두가 생각을 놓고 좋은게 좋은 손쉬운 용서를 저변에 깔아 놓음으로서 실존적 문제를 쓸어 버린다. 다시는 현실로 복귀하고 싶지 않은 분열적 상태의 지속을 바다 이야기에 찾는 대중들로 가득차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이러한 반동적 심리는 이명박의 능력이나 인물의 매혹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대게가 정권교체의 열망이라는 노망 현상에 기인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나 이회창 보다 덜 보수적이고 실용에 가까운 이명박이 호주머니 사정을 좀 낫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박근혜의 권위적 보수로의 회귀보다는 낫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며 보여준 온갖 치졸한 태도와 저열한 교양은 스스로 제작한 사제 시한 폭탄이다. 실용적 보수가 옮고 그르다는 판단은 유보적이어도 도덕적 파탄에 대한 노망적 용서의 집단 행위는 분명 시한 폭탄의 파편에 당할 방패막이를 자체하는 꼴이다.

오늘날 대선 구도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의 빈곤이 주물러진 한덩이의 빗살무늬 토기를 구워내는 상황이다. 게다가 견디기 녹녹치 않은 정서적 폭력의 상황인 것이다. 아 정말 기가막힌 것은, 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가 겪은 시행착오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복 경험해보고서야 배우게 되는 것일까?

2007/12/05 18:08 2007/12/0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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