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운하의 개그

2007/05/31 20:35 / 생각
심상정 의원이 말한 "경부운하(반대하는 측의 정의, 찬성하는 측은 한반도 대운하)를 둘러싼 이명박씨의 7대 거짓말"은 거의 진실에 가깝습니다.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에는 일가견이 있는 한나라당에서 조차도 타겟이 된 공약이지요. 개발지상주의자들의 발상은 대체로 자신들의 황홀경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려 듭니다. 창조는 개발이고 개발하기 위한 기술의 도입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습니다. 세상을 하루만에 창조하신 하느님의 개발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한계 노동을 시험에 들게하고 회개하는 부류 입니다. 이를테면 이렇지요. 오늘 이명박씨의 한반도 대운하의 기본계획을 입안한 박석순 교수의 얘기는 흥미롭습니다. "환경 단체들 때문에 새만금 사업을 하며 4조원의 공정 피해를 봤다, 환경 단체들은 앞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에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고 거리에 쓰레기나 줏어라" 환경과 하천을 오래도록 연구하셨다는 분의 창조적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 입니다. 일단, 개발지상주의의 황홀경에 빠지고 나면 온갖 플랫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지식기반, 환경기반, 관광기반, 경제기반 과 같은 수많은 개발정치의 단어들을 보면 무엇을 만들겠다는 것을 확실히 합니다. 지식이 내용인 어떤 기반(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개발은 내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반을 만드는 것 입니다. 기반은 확실히 창조가 맞겠지요, 하지만 상상력은 아닙니다. 기반이 되면 지식이 쌓이고 저절로 사람들이 찾아와 관광을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개발지상주의자들은 확실히 창조적 황홀경, 아니 황홀경의 창조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새만금으로 돌아가 보면, 박석순 교수의 말인 즉 4조원의 손해가 난 것이 너무 아깝다는 말 입니다. 행여 현대건설의 시가총액이 6조인데 망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는 말투 입니다. 현대건설이 망하면 현대건설에서 종사하고 있는 불쌍한 노동자들은 어쩔 것이냐는 갸여운 보살핌은 아니지요. 개발지상주의자들은 언제나 그 기반과 기술만 생각 합니다. 예컨데, 태안반도 간척사업 때 보다 새만금 사업에 도입된 간척기술이 더 획기적이고 첨단이라고 하여 그 신기술에 하염 없는찬사를 보낼 수 있을 까요? 개발지상주의자들은 예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개발 밑천이니까요. 갯뻘을 등에 업고 힘든 생계를 유지했던 우리들의 이웃은 어떻게 되며, 그곳의 환경생태계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경부운하를 언급하면서 비판론자들에게 충고하는 일관된 말씀은 공부 좀 하고 비판하라는 것 입니다. 공부를 해야 할 쪽은 한반도 대운하 찬성론자들 입니다. 다른 공부도 아닌 인문적 공부 말입니다. 개발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정책을 세우시는 분들이 토목 공부만 앞세우시면 되나요. 여하튼, 이명박씨가 조금씩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한 건 확실해 보입니다. 물류와 경제효과에 집중되던 공약의 디테일에 관광이 슬그머니 자리 잡기 시작했으니까요. 청계천에 물이 흐르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고 2층 버스도 다니는 모양에 몹시 감동하셨겠지요. 그래서 삶의 윤택이 질적으로 바뀌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이웃들의 소리 없는 고통은 아직도 동대문 운동장에 갇혀 있습니다. 그 고통을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요, 관광시키겠다고 너비 200미터의 물길을 서울부터 부산까지 내겠다는 상상력은 가히 천지창조적 발생이네요. 한반도 구석 구석에 물길을 트는 범민족적인 토목 공사를 벌여 또 얼마나 많은 이웃과 환경생태계가 창조적으로 파괴될까요? 이 정도 상상하는데 상상력까지 필요할까요? 마지막으로 운하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 통문을 설치하고 물을 고이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썩는다는 상식적인 얘기에 전근대적인 치수를 운운하며 물이 고인다고 다 썩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창조하신 박석순 교수님, 개그하시네요.
2007/05/31 20:35 2007/05/3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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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를 포기하라

2007/05/23 18:21 / 생각
기자실이 언론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한목소리로 언론 탄압을 외치는 매체들을 보면 탄압은 탄압인 것 같고 기자실이 통합되면 당장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알권리가 침해되면 정보가 줄어 들고 소스가 동일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정보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되어 의견과 표현도 대게 비슷해질 것이다. 이거 큰일이다. 막아야 겠다.

언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하는 것보다 휠씬 거대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파악하는 세상은 어느새 비슷해졌다. 언론의 취사선택은 사안의 다양한 관심이나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이데올로기와 정치기반에 따라 다를 뿐이다. 저널리즘은 어떻게 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같고 하나 같이 같은 우상을 생산하고 이미지를 전파하게 되었을까.

기자실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 그곳에서 공식, 비공식 정보들이 난무하고 기사가 생산되어 그것을 알아야 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물론 현장의 기사가 직접 가판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데스크는 여기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첨가한다. 공간이 같으니 서로 컨닝도 하고 저널리스트 포퓰리즘도 무시 못할 테니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는 가정은 순진할까.

언론의 자유가 침해 받으면 민중의 알권리도 침해될까? 대충 그렇다. 기자실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한다. 알권리를 가지고 있는 민중은 그 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위임했다. 물론, 위임장 같은 건 없다. 기자실은 저널리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들만이 출입하여 제한된 정보를 취득하고 재생산하는 장소라고 한다. 민중, 시민실이 없으니 기자들이 배포하는 정보가 침해되면 당연히 알권리도 침해되는 구조다.

기자들끼리도 카르텔을 형성하여 정보를 독점하려 하고 기자증이 있어도 기자실에 출입하려면 이미 자리를 잡은 기자들의 투표를 통해 출입여부를 결정하였다고 하니 언론의 자유는 고사하고 신체의 자유조차 구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동안 그 잘난 엘리트 주의가 민중을 현혹시킨 우상이 어디 한 두가지 던가. 천박한 신체에 무관의 제왕을 쓰고 있으니 자가당착한 기사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겠다.

권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것, 포기도 당연히 권리 주체의 판단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포기해도 되는 것이다. 알권리는 언론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민중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 하지만 권리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판단은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더 이상 민중의 알권리를 방패 삼아 언론의 자유를 외치지 말고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외쳐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똘레랑스적으로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언론 스스로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더 많은 표현의 연대를 이끌어 내도록 하길 바란다. 기자실이란 공간적 시스템이 파괴되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스탠스를 거둬주길 바란다. 여전히 민중이 기대하는 알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맡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무현이 보여준 범국가적 분열증은 이제 말기적 증상으로 번지는 것인가, 특정 언론과의 대립각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노무현의 이미지 정치의 준비태세는 집권과 탈권의 시대에 동어 반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기타 치고 눈물 흘리는 대통령으로 이미지화 시켜 집권에 성공하고 난 지난 5년을 돌아 보면 우리들은 그를 정말 잘 알고 뽑았던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탈권을 하려니 역사가 두렵긴 한가 보다. 정책 보다 이미지가 우선인 선거 기간은 기타치고 눈물 흘리면 그만이었지만,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까지 한 마당에 언론에 알려진 것도 많고 알려지는 것도 많을 것이 차츰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는 우울증과 분노를 유발한다. 이미지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 권력은 물리력을 꼬드기고 임기 내내 개혁은 곧 통합이라는 원칙의 칼을 기자실에 드리댔다.

노무현의 원칙은 분열의 칼이었고 그 칼에 민중은 난자 당했다. 이미지 정치에 보기 좋게 당한 케이스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민중의 알권리가 이미지의 알권리로 변화하길 원하는 모양이다. 권력이 권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굳이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다. 알권리의 주체인 민중은 더 이상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알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면 된다. 알려도 알아주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그렇게 저항하면 된다.
2007/05/23 18:21 2007/05/2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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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의 디테일

2007/05/19 03:25 / 생각

오늘날의 네트워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술적인 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조직이라는 이름의 유기적 구성에 냉소적 입니다. 언제든 맺고 끊을 수 있는 현대적인 네트워크 속에 둥둥 떠다니는 정보들은 대체로 역사적 구성이 철저히 배제된 파편으로 존재합니다. 서사 구조가 없는 파편들을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짜맞추다 보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탈중심적 가치에 조응하는 텍스트를 생산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비선형적인 텍스르틀 네트워크에 흘려 보내고 열심히 유통시킵니다. 이러한 반복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선형적인 텍스트를 탑재한 후천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옮다고 믿는 정체성은 비유기적인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노마드 정신과 같아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노마드 속성은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명제를 진보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 들이게끔 합니다. 사람이나 정보나 스피드 있게 취하고 떠나야 하는 변화는 결코 진보적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경향의 섭취에 능숙하고 서사의 느림에 무관심한 오늘날의 젊은이나 학생에게서 역사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사의 느림과 노동의 무던함에 가장 답답한 건 자본 입니다. 자본의 스피드한 흐름과 냉정한 관계 형성은 네트워크에 충실한 사람들을 매료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안락합니다. 고용은 없고 성장이 있는 시대가 이러한 인과관계를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고용은 사원에서 관리자로 관리자에서 경영자로 이어지는 계급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성장을 의미 합니다. 따라서 프롤레타이아트 는 오늘날의 네트워크적 관계형성에 가장 뒤쳐지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이면서 자본가가 되어야 하고 사람과 정보를 방랑해야 하는 시대에 NL 이며 PD 라는 과거도 실시간으로 네트워크안에서 파편화되지 않으면 아무도 접하지 않을 개념이 된 것 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생활속의 디테일 그리고 제거할 수 조차 없는 네트워크는 모더니즘이 없던 사회에 너무 빠른 포스트 모더니즘을 불러 온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트랙백 보낸 곳

2007/05/19 03:25 2007/05/19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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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의 디테일

2007/05/15 03:18 / 생활

전쟁 같은 일상이 함축한 의미는 세계의 실체적 움직임에 순응하느라, 그 전쟁 같은 지독함을 느끼서일 겁니다. 전쟁이 일상 같을 수 없고,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이치입니다만 역한 속물스러움을 느끼는 요즘은 "나 같은" 이란 말맴돌이에 힘겹습니다. 인간을 소통하게 했던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면서 예술이 되었고, 과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은유로 들립니다. 은유의 반열에 이율배반이 있고, 표리부동 따위들도 의미적으로 합리하다고 하니 느끼고 말하는 문턱이 높아지긴 했나 봅니다.
세계의 문턱은 더 고달파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멀리 있다면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언어를 끊임 없이 표현해야 하니 일상이 전쟁 같은 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노선이 없는 대중들 보다 다중적인 주체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들과 화해하지 못하여 반사회적이며, 반민중적이라는 타이틀로 공격을 받는가 봅니다. 언어가 있는 세계라면 형식을 통한 감수성이 표현될 것 입니다. 이러한 사조는 전체적으로 일관적일지 몰라도 디테일은 이율배반적 입니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사회주의를 꿈꾸고, 모더니즘의 바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항해하는 모든 형식과 표현은 타당성이 없기에 모순이며 이율배반 입니다. 이율배반을 좋거나 좋지 않은 취미 판단으로 규정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옮거나 옮지 않은 윤리 판단의 잣대에 저울질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사조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 사회는 일정량의 물리적 덩어리가 아니라 이율배반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은유의 시대이고 정치적으로는 이미지화 되었으며 예술은 이질적이고 탈중심적입니다. 현대사회의 디테일은 절대선과 절대악, 절대행복과 절대불행의 어중간한 지점을 자유롭게 맴도는 이율배반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얼핏 어떤 정체성도 주체도 없어 보이는 이러한 어중간한 추구에 저항하는 이성은 지향 입니다. 정체성은 확고한 독립이 아니라 지향점 입니다. 지향은 스스로를 여러 형식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잘된 규정은 참 인 두개의 명제를 놓고 이율배반을 노리게 되며 조금이라도 지향에 가깝게 규정하는 것 입니다. 그래도 이율배반인건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자율적으로 규정했는가 라는 지점 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판단한줄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만큼 세계를 구성하는 이율배반의 에너지가 강력합니다.
자율적인 지향과 규정은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들을 규제하고 자율적인 실천에 의지적으로 변해가는 것 입니다. 디테일에 이율배반이 있다고 해서 모든 실천적 의지를 멈춰야 하거나 지향을 수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향이 덜 성숙되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피상적 관점이 지배적일 때 대체로 디테일한 이율배반에 좌절하고 구성된 세계로 안락하게 편입하길 원하게 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어려운 시도에 열정을 사치하는 것보다 가깝고 먼 지향을 성찰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 입니다. 자율적으로 말 입니다. 고독은 이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05/15 03:18 2007/05/1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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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패션문화

2007/05/11 16:41 / 생각

제2회 입양의 날 행사가 코엑스에서 열렸다. 지난 10년간 80여명 아이들의 대리모를 해오신 작은 이모가 표창장을 받으신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정체성을 찾거나 생부모를 찾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해 오는 곳이 대리모라던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하려 하냐며 핀잔을 놓던 기억이 난다. 독신 입양에 대한 구조적 담론에 가열찼던 시간은 많았으나 몸으로 살아 보이시던 작은 이모의 이야기는 잊고 있었다. 버려지는 아이가 없어야 겠지만, 아이는 버려지고 누군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버려진 아이를 사회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리모도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악랄한 리플은 아무런 고민도 없고 정리도 안되는 인간의 퀄리티 쯤으로 생각하겠다. 작은 이모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선배인 고찬수 PD 가 시트콤 등으로 외도를 하다가 다시 그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한다. 선배는 기부문화에 고민이 많다. 물론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시쳇말로 죽이 맞는 단체나 재단을 줄세우고 관심을 주목시키기 위한 강력한 MC 를 섭외하는 고단한 일은 기부라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선배의 얘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요즘 30대 독신 커리어 우먼들 사이에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유니세프나 월드비전을 통해 직접 기부하고 자신이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들과 소식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헌데, 자기가 기부하고 있다는 걸 왜 그렇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걸까? 홍보대사 인가? 어느 자동차 광고를 통해 세계 각지에 17명인가 자식을 두고 있다는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감동을 찍어 바르고 안젤리나 졸리의 심심치 않은 입양소식과 이에 고무된 헐리우드 스타들의 시너지 효과까지 매스컴을 타고 전해 지는 것을 보면 이것도 패션이구나 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의 저명 인사, 아니 사회의 저명적 가치나 레벨을 추구하려는 일종의 분열처럼 보인다. 기부라는 것은 대체로 사회적인 것이고 마땅이 그러한 가치체계에 준해야 개인적 만족 벽돌도 도미노처럼 엎어지는 것으로 보는 엄숙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대중영합적인 기부는 이것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 기부도 개인 만족, 타인과의 비교, 그러므로 해서 더 우월적인 것으로 갈아 입고 갈아 타는 패션주의가 되가고 있다. 어떻게 자기가 기부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아이보다 친구가 기부 중인 시에라리온의 아이가 더 이쁘다며 바꿔 달라는 저질스러운 스탠스를 취할 수 있는가, 감동을 샤넬로 찍어 바르고 기부도 상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놀라운 천박함을 보여준다. 기부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일종의 예의일 뿐, 공동체적 관심이며 사회적 문제이긴 하지만 형평성과 계급에 대한 문제라는 점, 사심의 개입이 적기를 바라는 일종의 사회적 순수성이라는 점 등을 들어서 뭐하나, 시들해지면 에스케이투로 바꿔 바르면 그만인데... 이건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이제 제발 말쑥한 상품이 은폐하고 있는 사회적 노력과 착취의 이면도 바라 볼 줄 알길 바란다. 어설픈 패미니즘으로 무작정 감싸지들 말고...

2007/05/11 16:41 2007/05/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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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합니다.

2007/05/10 13:40 / 생활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침묵으로 무성했던 지독한 소문들에 대답합니다. 뭉개친 몸둥이를 한껏 풀어 헤친 기분 입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기특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자 많은 인생에 기꺼이 동참을 눈물내게 했던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하는 말 따위가 건방지고 시덥지 않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걷고, 강물과 먼지를 깨우치며 살아 보이려 합니다. 돈으로 살지 않고 몸으로 헤프게 살아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어느 미래를 지나치게 꿈꾸지 않고, 지금 아파하고 보듬으며 용기를 내려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단출한 삶도 그칠 것을 압니다. 그때가 되어 우리가 헤쳐온 바다, 그리고 그 깊이를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우리가 함께 흘린 땀과 깨우침의 무게는 지금 그 바다에 던져 넣은 연자맷돌, 그것과 같을 것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결혼하려 합니다.

2007/05/10 13:40 2007/05/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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