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렛과 취미형식

2006/04/27 22:33 / 관심
이미 루시드 폴의 짧은 단상에서 드러났듯이 음악에 대한 감상적이나 해석적인 한계는 다른 세계관 보다 꽤나 모나 있다. 이런 모서리는 취미 감정이 없었던 장르더라도 어떤 음악에 대한 견해의 주장이 체제와 관계 없이 특별히 용감하다던가, 때론 음악을 생산하는 주체(사람이나 악기)의 외모가 특별히 호기심을 자극하면 며칠동안 오토리버스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특징적 취향이 특별히 마초적이지 않고, 다른 동성들과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보이지만 악기의 외모에 대한 감정은 나의 특징적 취향으로 보여진다. 첼로에 대한 오마주? 그것은 어느날 연습이 끝나 피아노 곁에 기대어진 재료였고, 그것은 어느날 아르노 강변에서 켜지던 '냉정과 열정사이' 의 재료였다. 그러한 재료들을 나의 취미와 편집증을 관장하는 어느 기관에 적절히 녹이게 되면 요요마의 '나코이카시', 'Silk Road Journeys','Obrigado Brazil' 등을 일주일 내내 전유할 수 있게 된다.


'뷰렛 예찬'을 읽고 실은 진지한 고민 없이 들어 보기 시작했는데(Heaven Tonight, Doors,Falling Star, Fly my Voice, 아마도 알거야 등, 솔직히 좀 가벼운 록이거나 김윤아?), 역시나 무의식의 각성이 연금술을 부리더니 정확히 4일째 뷰렛만을 소리로 인식하는 고막을 만드는 중이다. 음악이 좋다 나쁘다는 없다. 다만, 갑자기 생긴 라디오 로망으로 전자상가를 뒤져 진공관을 쫓다가 뷰렛, 밴드범, 루시드 폴, 요요마 를 오토리버스하는 통로가 막히는 것 같아서 이내 의지가 갈등으로 변해버린 건, 어쩔 수 없이 내 취미 철학이 따라 가는 것은 좋고 나쁨의 내용보다 먼저 오토리버스 하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형식 갖춤, 형식 탈바꿈의 노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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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7 22:33 2006/04/2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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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없는 사회

2006/04/25 17:03 / 생각
요즘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과 '대화(임헌영과의 대담)'을 읽어 냈고 최근의 술자리 대화에 의하자면, 경제적 중간계급이 상층 20%, 또는 하층 20% 로 급속히 전환되고 그 자본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어느 계급을 할 것 없이 '먹고 사는' 데만 모든 활동이 집중됨으로 인해 '지식인' 이란 생각하는 계급은 사라졌다는 독트린이 유효하다고 한다.


그로인해 지나친 계몽도 좋지 않지만, 우상에 대한 비판적 도전(리영희 선생의 말)조차 시들해진 마당에 존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리들의 이상한 계몽의식과 우상 반열에 대한 맹목은 점점 그 세를 더하고 있다. 외국인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러시아의 네오나치즘의 무리들과 300조원과 국익을 운운하는 황우석 지지자들의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들의 몸을 동학(?)의 혁명적 기운으로 불태우지 않고 그들과 다른 생각의 몸에 신나를 뿌리지 않는다 보장할 수 있겠는가.


걸핏하면, 성조기를 앞세우고 구국기도회를 하던 기독교의 무리들이 세금은 모국에 내고 마음은 미국에 있으며 정체성이 온통 그들과 같지 않아 안달이 나서, 그들을 비판하는 보통의 계급들을 무리단위로 위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십일조와 맞바꾸더니, 살생 금지의 경지에서 모든 생명을 긍휼하던 불교가 황우석의 무리와 같은 목탁을 치는 광경은 사뭇 그 맥락이 통하였다 당위해야 하는 현상으로 봐야 하는 지경까지 왔다. 민간과 종교의 범주가 우상의 다름이 아니라 지식의 다름에서 경계된다는 것을 보면 종교의 소리는 오로지 믿음의 소리가 아니라 지식의 소통과도 같다. 그 소통이 이런 현안이고 보면, 오늘날 한국 종교는 신화만이 비타민인 허약한 체질이었음을 반증한다.


이것은 지식인이라 불리워져야 마땅한 계급이 스스로는 자유인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그 책임을 모면하려는 온갖 면피의 처세술의 밝음에서 기인했다. 또, 9할의 노동 보다는 재테크의 램프에 룩스를 높이는데 지식의 9할을 쏟아 붓는 상업주의에서 기인했다. 마땅히 지식인이라 불리워져야 하는 계급은 민중과의 연대에 기꺼이 참여해야 함을 강요 당하지 않더라도, 제대로된 혜안으로 말하지도 게다가 쓰지도 않고 있다면 자유를 향한다는 지식의 본래 목적이 참작된 인간의 이름인 '지식인'이 아니라 빌어 먹을 '양아치' 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2006/04/25 17:03 2006/04/2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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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포구에 가 보았더니 아직 일러 절경이라는 낙조는 없고 샛바람만 가득 채운 소주잔을 흔든다. 든든하게 횟집에 엉덩이를 부치고 낙조 말고는 더 바랄게 없는 포구에서 인정 사나운 뱃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취할 생각은 일찌감치 침몰하고 고물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찬 소주병을 주머니에 차고 일부러 찾아올 턱이 없는 멋대가리 없는 포구 반대편에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건너가 보았더니, 역시 아무도 있을 턱이 없는 작은 모래사장에서 사랑을 천칭에 달면서 시작된 일체의 상념들을 들춰내 보았다. 그러므로 응당 통속적인 감정으로 부터 센티멘탈한 자세를 가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는데, 그런 자세가 도대체 별 볼일 없는 세간 살이와 유폐된 감수성에 무슨 호사스러움으로 사기를 치려 하는지 알아채 버리고 나니 넉넉히 할 일도, 사색도 신통치 않게 되었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설레이는 끈과 의심스러운 묶임들이 있었던 시절에서 착잡한 잡념들을 끌고 어여쁘게 입을 벌린 지옥문 같은 포구에 정박하는 배가 있어, 한사코 올라 타 보았더니 얼마나 멀리 갔다 오는 길인지 인연들이 만선이다. 이렇게 살았구나, 한번에 묶고 풀 수 있는 배를 기다리는 판타지가 뱃사람들 눈총 피해 들이킨 찬 소주 한병 탓은 아니겠지만, 이미 인연을 묶고 풀었던 배들이 궁평 포구 모래사장에 한가득이라, 아니 막연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도 취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궁평포구 사진

2006/04/20 21:12 2006/04/2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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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생리는, 결코 경쾌한 경험이라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하지 않는 남성으로써 이해해보려 노력하지 않았던 생물학적 젠더 불평등일 것이다. 글세, 이것에 대한 남성의 이해도는 마법에 가깝거나 기껏해야 깨끗하지 못한 패드에 대한 기억으로 점철된다. 패드가 깨끗해야 한다는 어이 없는 생각이 솔직한 남성의 무의식이고 보면 무지하다기 보다 생리를 보는 막연한 부정, 또는 부끄러운 시각이 문제일 듯 싶다. 그렇다고 여성의 생리를 지금부터 아름답게 생각해야 한다고 비약적 레토릭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불결한 범주에 계속 넣는다거나, 그때가 된 여자친구 또는 아내? 가 보이는 신경질을 받아주어야 하는 귀찮음이 반사적으로 싫었던 몰이해의 감성은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남성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리혈이 묻은 속옷을 빨아주는 급작스러운 패미니스트로의 전환을 모색하는데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남성들이 생리대를 한번 차보는 경험에 대한 지적은 대단히 참신하다.


생리해주세요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20 11:47 2006/04/2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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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에서

2006/04/17 20:20 / 사진
그 논두렁에서 붉은 석양이
어깨에 짊어 진 삽얼굴까지 붉은 물을 들여
뚝뚝 떨어 질 때,
왠지 재수 좋은 기분이 드는 저녁이면
먹는 풋고추는 유난히 맵고
아직 일손 놓지 않은 아버지 콧등에
솟은 땀 냄새까지 나는 날.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은하수 떨어지는 소리까지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은 작은 동네였습니다,
담도 없는 대추리는, 그랬습니다.



이어지는 대추리에서..



대추리 바로 알기(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2006/04/17 20:20 2006/04/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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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를 찌라시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김대중, 류근일 등이 친미사대주의, 신자유주의의 삐끼를 공공연히 표방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은 무관의 제왕을 자처하며 기필코 혹세의 펜이 마르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금석이며, 이들의 가장 나쁜 태도는 미국의 시각이 곧 세계의 시각이고 세계의 모든 것인양 호도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직 현실의 면면인 태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이라크 파병, 대추리, 새만금, FTA 등 = 거지처럼 비자 구걸하기)


미국의 어여쁨이 없이는 도저히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고 작정할 수 조차 없는 이들은, 작금의 현실을 문명의 충돌과 종교 전쟁의 양상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과제가 마치 이 세기적 전쟁에서 미국의 편으로 살아 남아야만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안보를 건드리고 다음은 민족의 열등감 내지는 이 땅의 태생적 척박함을 사명적 대명제로 내세우는 것은 이런 류의 찌라시들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전쟁을 피해야 한다면서 이라크 파병을 관철시키는 교양머리와 이렇게 척박한 땅을 그 고귀한 미군의 기지로 내주는 센스는 이들의 오랜 동어반복이다.
(2006.04.10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보기)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책임 떠넘기기는 평택의 땅에서 뒹군 사람이 미국이라는 마법에서 풀려나오지 못한 행동이라며 가당치도 않은 혜안을 과시한다. 미국의 마법에 빠져 자원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나라는 기름이 없고 기독교인은 많으니 기독교 나라의 편에 서서 자원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기가막힌 해법까지 제시한다. 어느 쪽이 미국의 마법에 걸려 있으며, 그렇게 빠져 버린 마법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제 민족과 제 신념의 딜레마에 맞써 용기 있게 투쟁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의 찌라시 칼럼 속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오직 두 가지, 미국적 레토릭에 민족주의적 광풍으로 열광하기를 선전하는 것, 미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운명적 과오로 여기며 살아줄 것을 강요하는 것, 이다. 이들의 그 잘난 교양은 미국적 시각이 아닌 모든 것에 비난을 아끼지 않고, 미국적 시각이 아닌 모든 것이 생산한 세계를 폄하 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데다가, 다른 사람들의 접근조차 막아 버림으로써 배움 조차 할 수 없게 만들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것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명백한 재앙' 이다.
2006/04/13 13:51 2006/04/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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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선입견

2006/04/13 09:50 / 분류없음
엘리자베스와 다이씨의 오만과 편견이 없었다면 좀 더 편한 사랑이 되었을까? 오만과 편견을 버리면 사랑이 좀 더 쉬워졌을까? 아마도 그럴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존재자로 여기고, 자존을 지키지 않는 존재자는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더 많고 조금 덜한 차이가 있을 뿐, 부재를 통한 존재자의 논함 자체가 넌센스이다.


오만과 편견이 악의에 의한 태도로써 언어적으로 용례되지만, 편견 없는 실존적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적인 사물 또는 다른 존재자를 대하는 존재자가 편견(선입견,관) 없이 오아시스처럼 흡수하는 성질만 가지고 있다면 완전한 무의 상태로 존재하는 즉, 부재를 통한 존재자를 가리키게 된다. 지식의 내용이나 사상의 형식으로 구성된 편견 없이 오로지 객관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현상은 없다.


편견이란 것은 정체성에 관련된 의식이다. 나를 밖으로 내놓은 정체가 받은 사물과 현상을 판단하는데 선입견이 없다면 나의 안에서 밖으로 나와 사물과 현상을 받았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정체성이 없는 것과 같다. 애써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것만 같은 의도는 때로 나의 얘기나 주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은 진정성 있는 판단이 아니거나 책임회피의 소재가 된다.


정체성의 기준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의 잣대이다. 따라서 어떤 이념과 사상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선입견을 기준으로 다른 사상을 가진 양면에서 편협한 사고 운운하는 것은 가슴의 울림이 아니라 머리의 립싱크일 뿐이다.
사물과 현상의 판단에 양심과 사회적 책임이 있고 의식에서 나온 자신의 스토리를 통해 주장할 줄 안다는 것, 괜찮은 선입견, 진지한 편견 없이 될 수 있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무책임한 정체성을 요즘엔 '좌파신자유주의' 라고 하든가... 참, 알수가 없다.
2006/04/13 09:50 2006/04/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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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2006/04/10 23:50 / 관심
제2의 세익스피어라 불리우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은 계급이 살아 있는 19세기 영국의 로맨스 문화와 일반적인 찬란한 사랑의 한줄 테마로 쓰여진 소설이 아니다. 남녀간의 영원한 스토리가 현대적 여명기에 계급과 어울리면서 좀 더 나은 계급, 또는 처지로 입적하기 위한 가장 사랑스러운 방식이 결혼! 이라는 해피엔딩에 관한 이야기다. 이 19세기의 고전이 조 라이트에 의해 영화화 되어 21세기의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의 결혼관과 일맥상통함을 어필하게 되었고, 적지 않은 열광?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19세기나 21세기나 양극화의 해소로써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 또한 결혼! 이라는 사실은 씁쓸하다. 게다가 가장 사랑스럽다는 마지막 장면의 어처구니 없는 자발적인 계급적 종속의 인정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2006/04/10 23:50 2006/04/1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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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알권리

2006/04/06 17:10 / 생각
대중의 알권리는 저널리지즘의 리버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표현의 자유는 매체의 속성이 전통적인 저자들의 개념을 받아들이던 계층을, 표현력을 가진 저자로 변화시키면서 그 욕구의 반동적 의도로 발전되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표현의 자유는 특정 계층의 특수한 권리였으나, 필요 이상의 소통이 가능한 현재의 혁명적 상황에서는 모두의 권리로 발전 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됨으로써 표현력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알아야 하는 범위를 확대 시킨다. 개인은 이런 확대된 범위를 권리로 귀속시키며 대중이라는 연대의식의 기저 아래 두길 원하게 된다. 이렇게 권리로 무장한 개인이 대중의 지위가 되면, 표현의 자유는 여론이 되고 권리는 확대된다. 확대된 권리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포퓰리즘이 되거나 데모크라시가 된다.


모든 권리가 그렇듯, 침해되지 않는 한 지속된다. 앎의 범위가 간섭 받았을 때 알권리도 심연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권리가 앎의 호기심인지, 권리의 호기심인지 사안을 주장하는 대중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줄기세포의 특허권에 관한 내용을 다룬 KBS 추적60분의 편성 여부에 대한 대중의 논란이 그렇다.


황우석씨에 관련된 내용은 무엇이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습성을 따르듯 편성한다, 과학적 증명이 안되어 편성 안된다, 편성해라, 안하면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편성 안하면 인터넷에 방영하겠다, 그래도 안된다, 결국 잠적한 담당 PD 는 저작권의 유권해석에 밀려 있는 상태인가 보다. 얼마나 비밀이 많고 복선이 많으면 반전을 거듭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담당 PD 의 윤리 저널리즘을 논할 것 까진 없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했기도 했거니와, 모두에 얘기했듯 매체의 속성에 따라 퍼블리싱을 하는 모든 블로거와 미니홈피 사용자가 저자가 되었고 그들 또한 미시적 저널리즘의 책임 범위안에 들기 때문이다.(저자로써의 대중은 그 책임 범위안에 들지 않는다고 애써 외면하려 하기 때문에 더불어 그 PD의 윤리 저널리즘 마저 논할 가치가 없어진다.)


[여론이라 불리우는 대중적, 집단적 시각은 어떤 앎의 범위로부터 나왔는가에 따라 다르다? 아니다, 앎은 그 자체의 취미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사람 또는 계층이 관념적 판단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추적 60분을 편성하라는 요구는 알권리로서 앎의 호기심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호기심을 작동시켜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취해 관념이 이미 강박으로 치닿는 어떤 것(그들은 그것을 국익이라 부르지만)을 견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지식의 쓰임새를 꺼꾸로 대입시켜 절대로 옮고 그르던 그 담론에는 변화가 없게 만드는 사용법이다. 따라서 선택적으로 알권리를 제한하자며 우익적인 주장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알권리를 바탕으로 한 대중의 선(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대중적 판단이 국익과 같은 소통 불가능한 추상에 얽매어 있다면, 알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대중의 집단적 앎이 앞으로 대중이 될 개인에게 호도된 진실로의 선동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대중에게 지식은 교양이나 태도로 다뤄지지 않고 진실 없는 내용을 쫓는 맹신이 되었음은 오늘날의 현상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됨을 충분히 알려준다.


차라리 그들의 주장대로 추적60분을 원안대로 편성해도 될 것을 가정해 본다. 공개된 대본을 보니 누가 봐도 어렵지 않게 판단이 가능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신념이라 부르는 국익 같은 것을 앞잡이 세우면 가능성을 매개 삼아 담론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두려운 것은 그 어설픈 미시 담론이 뭉쳐 거대 담론이 되고 약간의 대중적 포룸 알데하이드가 스포이드로 떨어지면 누군가가 의미 없는 분신으로 치달아 버리기 때문이다.

대중적 알권리는 그렇게 암적 존재로 변질 되었다. 그 변질이 비단 황우석 스토리에서만 존재할까...
2006/04/06 17:10 2006/04/0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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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 뿌리에 대한 집착이 많은 탓에 고향은 향수의 감수성 차원을 넘어선다. 근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노력해도 별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다. 근본이야 말로 변하지 않는 근거라는 뿌리주의는 별 탈없이 노동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무의식과 같은 강박관념을 가지게 한다. 고향을 떠났다면 돌아올 때는 금의는 아니더라도 반딱거리는 명함 한장 돌릴 수 있고, 농기계 다니던 길에 중형차 정도는 몰고 나타나 동네 사람들한테 인사는 해야 고향 떠난 사람의 미덕(?)이 된다.


하인즈워드가 돌아왔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다. 스포츠 좋아하고 대~한민국 좋아하는 사람들의 환영처럼 그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스포츠 스타의 금의환향으로 남들처럼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 단지 시니컬에서만 기인한 건 아니다. 혼혈인 관계로 제 나라라는 데서 쫓겨나 갖은 우여곡절(제 나라에서 조차 쫓겨난 사람이 호의호식 했겠는가)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으며 실오라기 같은 기회에 승리한 사람이 하인즈워드라면 그는 이미 나라가 없고(나라가 버리고), 한국인인지 세계인인지 정체성이 없는 어떤 황인종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는 그 자체로 스타이고 영웅일 뿐이다.(그 정도로 환영을 할 수는 없는 거니?)


따라서 대통령과 이명박이 나서서 필시 그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라는 메시지를 받을 자격이 없고, 받아서도 안된다.(먼저, 해서도 안되는 것이 자기들이 만들어야 할 환경은 평소에 등한시 하고, 기껏 하인즈워드 데려다가 식사 한끼, 명예시민증 한장으로 의무를 전가시키는 치졸한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인즈워드가 아무리 미식축구의 스포츠 영웅이라 할지라도, 일단 대한민국에 발 하나쯤 걸치고 있게 되면 스포츠 라는 것으로 상업화되고, 영웅이라는 것으로 정치화가 된다. 나라와 가족이 협작하여 팔아 치운 토비 도슨 또한 다르지 않다. 나라나 가족이나 상업적인 활용이 가능한 시기가 되어야, 그 구성원을 반기는 인간성의 몰락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한 저변은 못 먹는 감 찔러보기 식으로 너도 나도 아버지라며 나섰던 토리노 올림픽의 끝물을 기억하게 한다. 이건 가족의 테두리가 가진 기본적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제 토비도슨이 먹고 살만하다는 증거에서 반동하는 혈연상업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인즈워드가 방한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제 뿌리 모르는 후레자식이라며 천박한 혈연지상주의에 혈을 토할 사회계층은, 지금 난리 법석을 떨며 당신을 환영하는 계층이다. 그들은 평소에 혼혈이라면 학교에서 왕따시키고, 일할 기회를 공평히 주지 않았던 계층이다. 하인즈워드, 지금은 환대 받아 한국인인게 자랑스러울지 모르지만, 대~ 한민국이란 나라가 그런데다. 당신만 환대하면 다 되는 줄 알고, 무엇하나 사회현실로 승화시키지 않는 그런 나라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다른 혼혈인은 여전히 차별할 것이고 당신도 내년에 다시 MVP 가 되지 못하면 완전히 잊혀질 데가 대~ 한민국이다.
2006/04/04 13:23 2006/04/0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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