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그해 여름은 작년 초가을에 있었던 KAL 추락사고의 열기가 가솔린에 붙은 불처럼 길위에 떨어진 영혼까지 순식간에 태웠다가 차갑게 사그라들곤 했다.
그해 여름, 쉽게 타버리는 티슈 같은 영혼의 나는 강원도 두메 곳곳을 헤매고 있었다. 일과 여행에 문턱이 없어서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얼핏 자유로운 그것은 생각보다 어렵게 어렵게 독서를 하게 하고 사색에 미치는 것을 절제하는 패턴이었다. 대청봉을 300여 미터 앞두고 3일 정도 잠복할 텐트를 치고 나면 날숨 들숨 보다 빠르게 골짜기를 넘어 오는 어둠속에서 사색의 시작은 여지없이 괌 KAL기 추락사고 였다. 그렇게 나는 현실속에서 드문드문 정신을 놓는 법을 배우다가,비로서 열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김영하한강의 소설집을 꺼내어 눈으로 읽어 냈다.

"연애하는 건 누군가의 잘못으로 깨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깨질 만하니까 깨지는 것이 연애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그때의 나는 내 잘못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혹 잘못이랄 게 있다면, 하루에 꼬박 두 편씩의 비디오를 보는 것과, 그녀에게 늘 싸구려 귀걸이를 사준다는 것과,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따위를 전혀 쓰지 못해봤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게다."

"신부 대기실로 찾아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그녀에게 다가가서 멋진 말을 해주는 상상을 나는 수십 번도 더 해보았다. 상상,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복수였고 오락이었다. 내가 생각해낸 가장 멋진 말은, 지나는 길에 들러봤어, 였다"
[김영하 '호출']

재주는 쥐뿔도 없으면서 글쓰기를 희망하던 내 청년시절은 나르시즘의 결정체였다. 현재는 그것이 '가오' 라고 단어만 달리한 같은 기의로 내 생활을 유지시키고 있기도 하다만, 희망이란 것 자체가 쥐뿔도 없을 때 의미가 있는 사유 아니겠는가...
김영하가 그저 반가운 것은 이별과 함께 내 잘못이 과연 무엇일까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상상하면서 스스로 분노하고 복수하고 통쾌해 하는 분열적 나르시즘을 발견했을 때 였다. 게다가 "지나는 길에 들러봤어.." 는 쿠우울한~ 가오가 나르시즘을 극도로 절제하는 말투...
쥐뿔도 없으면서 희망을 사유에서 그치고 말게하는 슬픈 절제. 열광적인 절제에 나르시즘은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는, 김영하는 그랬다.

김영하를 눈으로 읽을 때는 그저 반갑다가도, 이게 뭔 소리야, 미친, 글 잘쓰네, 정도에 끝이 났지만, 한강을 읽을 때는 생면부지의 이 여자를 속으로 죽이고 또 죽였다. 작가 몇명쯤은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 평론가들의 찬란한 찬사속에 아버지(소설가 한승원)의 후광과 더불어 가냘프고 이쁘장한 외모까지, 게다가 작가소개에 선명히 찍힌 동갑내기의 활자는 쥐뿔도 재주는 없지만 소설을 쓰겠다고 티슈 같은 영혼으로 가솔린 불길에 맞섰던 열광을 연탄가스를 마신 것 마냥 잠재운 절망이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 앞에 또닥또각 손가락 뼈를 부러뜨리는 수밖에 없음을 알고 나니, 후련하다고 해야 하나... 글은 저만큼 진지하게 관조하고 각혈이 뭉쳐 도리어 투명한 눈물을 토해낼 수 밖에 없을 때, 바닥에 고인 물을 박박 긁어 내는 우물 같은 감수성만 남았을 때, 띄엄띄엄 삶을 조립할 수 있는.. 그것이 글임을 알고 나니,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사색과 괴로움을 동시에 시작하게 했던 KAL 추락 사고도 지나는 길에 들러보는 신부 대기실이 되버렸던 것일까? 그해 겨울, 나는 신춘문예 같은 것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사랑에만 집착하다가 여전히 길위에 영혼을 놓고 불장난을 했다.
2004/11/16 01:53 2004/11/16 01:53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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