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 서재에 앉아 있으면,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하셨을 때부터 우리 남매의 학창시절을 넘어 지금까지, 어느 한가지 버리지 않은 3천여권의 서적과 노트들이 제법 텁텁한 종이향기를 낸다. 그래서 가끔 뜻하지 않은 책갈피와 노트를 발견하곤 한다.

1990년 1월1일부터 3월6일까지 쓴 노트는 누런 세월이 배어있다.
아포리즘(aphorism) 이라고 한껏 겉멋을 내고 끄적였던 번민들을 읽어보니, 여백이 많은 아날로그와 행간이 정해져 있는 디지탈이란 차이만 있을뿐 세상에 대한 여전한 더듬거림을 느끼게 한다.
맥심, 푸른 하늘을 보지않으련? 이란 제목으로 11장에 걸쳐서 쓴 습작은 군데군데 사경을 헤맨 사람의 몸짓처럼 북북 그어댄 문단마저 선명하다보니, 만년필로 한자한자 눌러가던 열기가 못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이 알수 없는 제목의 습작, 도무지 모티브와 시퀀스는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자기전에 혼자 수줍어 하며 그 까닭을 헤어려볼 참이다.

90년 1월1일
누락되는 追憶 속에서 무엇인가 가능성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난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은 옛것에 비추어 생각해야 한다.
장애물도 많고 시련도 많지만 세상은 때론 공평해서 떨어져 버린 삶도 고무줄을 놀리듯이 점점 팽팽해질수 있는 것이다.

90년 1월4일
(바르지 않고 45도 각도로 어떤 글위에 갈겨씀)
펜을 놓기 위해 이런 글을 쓴다면 쓸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고정관념, 편견에서 벗어나 글을 쓴다면 고식적인 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생각해왔던 관념을 깨끗이 일소한 후에 노폐물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하자.

90년 1월12일
여행을 가고 싶다. 낯선 곳에서 일박이라도 하면서 차가운 냉바닥을 느끼고 싶다. 그런 곳에서 처음 느끼는 삭막함 조차도 포옹으로 느끼고 싶다.
이제 시를 쓰자, 시작에 들어가자, 작은 새의 몸짓까지도 깊이 파고드는 냉험한 눈빛이 필요할까?

90년 1월14일
내가 무엇이건 말하고픈 뜻은
내가 어떻게든 해야하는 일은
내가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도록 얽혀진 망은...

90년 1월20일
외로운 길은 어차피 외롭더라도 가야할 길
사랑하는 이들에겐 슬픔 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다.
4년, 공부하기엔 짧지만 다른 것들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
사랑하기엔 짧은 세월을 보냈건만,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던가?

90년 2월1일
맥심, 푸른 하늘을 보지않을련?
(습작 제목)

90년 2월6일
문학속에서의 사랑의 미학과 사랑이란 관념의 틀에 관해서
( 헤럴드 볼룸의 '오독의판도' 와 마가렛미첼의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의 독후감)

90년 2월12일
무척 힘들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너무 허무할지도 모를거야, 스스럼없이 자기를 비판할지도 모르고.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라고 비로서 선을 그을지도 모르지.
그래, 어떤 생각을 가져도 좋아, 모두 주관적이니까 그리고 갑갑한 현실이니까, 그렇지?
우리의 현실은 1990년인데, 희망은 1991년이니까...
(친구 수정이 에게 보내는 편지중... 이 친구 수정이는 모할까?)

90년 2월19일
친구 보게
네가 내 글씨를 알아보고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면 여행을 다녀온 후겠지, 어때? 여행은 재미있었겠지? 제주도까지 간다고?
(친구 *** 에게 보내는 편지중...)

90년 2월24일
망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늘 나는 너를 대하려고 하면 망설여진다.

90년 3월4일
(이 글은 차마 여기에 옮길수가 없다... 평생 이 노트에만 있어야 할 글인듯)

90년 3월5일
환기통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언제까지나 밀폐된 채로 지낼수 없고, 그 밀폐된 공간이 폭발하는 순간 거대한 팽창력의 위력을 염두에 둔다면 그동안 경시되었던 자유가 흐름을 타고 압박으로 변하면서 과격스런 투쟁으로 일그러졌다는 점도 상당히 이해가 간다.

90년 3월6일
낙조가 장관이지, 신이 우리에게 별을, 하늘 가득히 사주기 위해 반짝이는 동전을 투입구 속으로 넣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과는 회복이 어울리지 않아, 이 증상이 저 증상으로 전이할 뿐이지...

나의 실종을 그대 가슴속에 남겨두고 떠나던 날
(김초혜 '사랑굿 160')


한낮의 백합처럼
5월의 드맑은 하늘처럼
비록 밤이면 사라질 운명이어도
낮동안은 한없이 아름다웠어라
잠시뿐인 아름다움이지만
그 일생은 더 없이 완전하리
존슨 [Jonson, Ben, 1572.6.11~1637.8.6]

.
.

그로부터 14년이 지났다.
맥심, 푸른 하늘을 보지않으련?
2004/09/11 00:16 2004/09/11 00:16
DrunkenSTAR 이 작성.

Trackback URL : http://drunkenstar.x-y.net/tt/trackback/46

Trackback RSS : http://drunkenstar.x-y.net/tt/rss/trackback/46

Trackback ATOM : http://drunkenstar.x-y.net/tt/atom/trackback/46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

« Prev : 1 : ... 484 : 485 : 486 : 487 : 488 : 489 : 490 : 491 : 492 : ... 512 : Next »